현대시 33

관측, 이영주

관측 이영주 지구의 중력이 인간의 피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피는 심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빛이 폭발하면 별을 볼 수 있다.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곳에 잔뜩 힘주고 서 있는 것이 어둠으로 가는 길이었나. 렌즈 안으로 푸른 숲이 번진다. 수은이 빛나는 의자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랑 상관없이 노래를 불러도 되지?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헤어지는 노래를 사랑을 담아 부른다. 뜨끈하고 이상하고 끈끈해. 새벽에 걸어 들어온 수목림 내가 걷는 숲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피가 물들어 있다. 망원경에 입김이 피어오른다. 물큰하게 젖은 잎들이 흔들린다. 자꾸만 이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지구에서 흐르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너의 혈액 때문이었나. 붉게 물든 발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인가. 크..

안녕, 다니카와 슌타로

안녕 다니카와 슌타로 나의 간장(肝臟)이여 잘 있거라 신장과 췌장하고도 이별이다 나는 이제 죽을 참인데 곁에 아무도 없으니 너희들에게 인사한다 오래도록 나를 위해 일해주었지만 이제 너희들은 자유다 어디로든 떠나는 게 좋다 너희들과 헤어져서 나도 몸이 가뿐해진다 혼만 남은 본래의 모습 심장이여 때때로 콕콕 찔렀구나 뇌수여 허튼 생각을 하게 했구나 눈 귀 입에도 고추에게도 고생을 시켰다 모두 모두 언짢게 생각하지 말기를 너희들이 있어 내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너희들이 없는 미래는 밝다 이제 나는 나에게 미련이 없으니까 망설이지 말고 나를 잊고 진흙에 녹아들자 하늘로 사라지자 언어가 없는 것들의 동료가 되자 에 실려있던 시 한 편을 옮긴다. 이제 노인이 된 시인이, "아무래도 젊은 시절에는 쓸 수 없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32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 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 있다. 형태를 만져 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10년 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 곳은 ..

여행, 페터 오토 코체비츠

오래된 노트를 뒤적이다가 메모해둔 시가 있어 옮겨 놓는다. 어디에서 옮겨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노트에는 시만 옮겨져 있다. 여행 코체비츠 나는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 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 이제 나는 울므에 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리고 코체비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았다. 한국어로 된 자료도 영어로 된 자료도 없었다. 페터 오토 코체비트(Peter O. Chotjewitz,1934 ~ 2010). 독일의 작가이자 변호사..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유희경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유희경(지음), 아침달 어쩌면 진짜 나무에 대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진짜 나무가 사람 되기를 꿈꾸는 이야기, 그래서 흔들, 흔들거리는 시집일 지도. 아니면 나무가 되고 싶다는 사람 이야기일지도. 하지만 그 나무는 외롭지 않아야 한다. 시인은 '나무로 자라는 방법'을 찾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혹은 찾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 나무로 자라지 않고 나무로 자라는 꿈만 이야기한다. 문장은 한결같이 하나로 끝나지 않고 두 세 문장으로 이어지다가 마침표 없이, 시는 끝난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중에서 한 문장이 있다, 그 문장을 부정하는 몸짓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건 생각 뿐이다. 행동이나 실천이 ..

연인들Lovers, 리처드 브라우티건

Lovers - Richard Brautigan I changed her bedroom:raised the ceiling four feet,removed all of her things(and the clutter of her life)painted the walls white, placed a fantastic calm in the room, a silence that almost had a scent,put her in a low brass bedwith white satin covers and I stood there in the doorwaywatching her sleep, curled up,with her face turned away from me. 1969년에 나온 시집 에 실린 시다. 초..

흰밤, 백석

흰밤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묵은 초가지붕에 박이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백석, 1935년 11월, 혼자 술에 취해 거실 탁자에 앉아 시집을 꺼내읽다 왈칵 눈물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눈물에, 내가 왜 이럴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감수성이라는 게 살아있었나 하는 안도감을 아주 흐르게 느꼈다. 글쓰기는 형편 없어지고 책읽기도 그냥 습관처럼 변해, 종종 내가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요즘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지혜가 생긴 것도 아니고 논리 정연해진 것도, 그렇다고 사람들을 감화시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십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다. 도리어 거짓말장이가 되고 불성실해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선사..

충분하다,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지음), 최성은(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왜 내가 새삼스럽게 외국 번역 시집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번역된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아마 언어 너머로도 전해지는 시적 감수성, 또는 해석의 가능성, 그리고 지역과 언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태도 같은 것에 감동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쉼보르스카의 시들은 한글로 옮겨지더라도 그 시적 매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는 역자의 노고일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 자체가 가진 힘을 그만큼 대단한 것일 게다.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강의 백일몽, 로르카 시집, 민음사

사진출처: https://www.concertgebouw.be/en/event/detail/1442/Federico_Garcia_Lorca 강의 백일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정현종(옮김), 민음사 이 번역 시집은 시인 정현종이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어떤 시들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지고, 옮겨진 그 언어에서 다시 또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사이에도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 해댱된다.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총살당한 이 스페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자면,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첫 사랑을 만난 듯 가슴 떨리고 흥분된다. 서정적인 강렬함이 지배하는 로르카의 시 세계는 후회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청춘의 아름다운 ..

체의 녹색 노트

체의 녹색노트구광렬 엮고 옮김, 문학동네 음유시인 니콜라스 기옌 알갱이가 빽빽한 옥수수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부하들이 그란마에서 내릴 때,격정의 바다는그들이 난폭한 걸음으로 출발하는 걸 본다 턱수염 없는 근엄한 얼굴,이마엔 나비들을,구두엔 수렁, 늪을,죽음, 군인처럼 노란 유니폼에 미제 총을 한 죽음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몇몇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으며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손가락 수보다 조금 더 많은 수가 희망과 피로로 다시 영광을 향해 출발했다 깨어난 길에선 주먹을 움켜쥐고 양귀비를 따 노래를 불렀다 칼날은 빛났으며 총은 번쩍거렸다 마침내 산속으로 먼저 들어간 피델 카스트로는 병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에서 내려간다.평원은 총들의 바다가 될 것이다."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 사망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