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세계화의 폭력성, 장 보드리야르

지하련 2009. 2. 15. 12:34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프랑스의 사회학자. '시뮬라시옹'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학자이다. 나는 장 보드리야르의 암울한 사회 분석을 싫어했으며, 그것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의 끔찍함을 무시하면서 장 보드리야르를 전파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멸했다. 그들 대부분이 의지하는 책이나 이론은 오직 시뮬레이션 이론이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극단적인 반-플라톤주의자이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자면) 마키아벨리와 같은 전도된 이상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20세기 후반 이후의 매스미디어에 의해 희석되고,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사라지고 미디어들에 의해 새롭게 조작된 것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하이퍼-리얼리티나 시뮬레이션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철학의 시작부터 고매한 영혼을 아프게 했던 눈 앞에 보이는 것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에 종지부를 찍고 거짓과 가상의 승리를 예견하는 듯한 그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면서 그의 이론이 마치 포스트모더니즘 구세주인양 전파하던 국내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역겨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찬양하는 이론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사이퍼와도 같음을, 그리고 그 귀결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사람들과 만날 일도, 그런 사람들이 쓴 글을 볼 일도 없지만, 나는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울화가 치민다. 마치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설은 끝났'고 '영상(영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류의 글을 아무런 생각없이 써댄 문학이론가(문학평론가)들을 떠올릴 때마다 치미는 울화와 비슷하다. 그 때부터 한국 문학의 하향 평준화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나는, 전혀 다른 매체적 특성을 가진 소설과 영화를 마치 한 부모 밑에서 난 이복형제 다루듯 써댄 글들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웠다.

장 보드리야르. 마치 악마의 날개를 단 천사처럼...

얼마 전 나는 그가 죽기 전에 쓴 '세계화의 폭력성'이라는 글을 읽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키아벨리를 떠올렸다. 전도된 이상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를. ... 어찌되었건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의 분석에 있어서 탁월한 시각으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며,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나, 끊임없이 되새겨 볼만한 통찰을 숨기고 있으며, 그의 암울한 세계관과 대결하면서 현실 세계를 꾸려나가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그 글의 일부를 옮긴다. 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써, 유용한 시사점을 담고 있는 글이라 여겨진다. 이 글은 르 몽드 디플로마크 2008년 12월 한국어판에 실렸다.


세계화의 폭력성


- 원래 보편성은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런데 이데아가 세계화 속에서 현실화 되면서 이데아는 이데아로서 자멸하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인간이 그 본보기다. 인간은 죽은 신의 빈자를 차지한 뒤, 세상을 홀로 지배하게 됐지만, 최종적 이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적이 없어진 인간은 적을 내부에서 키우며, 비인간적인 종양 덩어리를 분해낸다.

- 바로 여기로부터 세계화의 폭력성이 생성된다. 즉 모든 형태의 거부, 나아가 최후의 죽음 같은 모든 형태의 기이함까지도 몰아내는 시스템의 폭력성과, 사실상 알력과 죽음이 금지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폭력성과,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 폭력성 자체를 종식시키고 모든 자연적인 질서, 몸, 성별, 탄생 혹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동되는 폭력성 등이 그것이다.

- 폭력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유해성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왜냐하면 그 폭력성은 바이러스성이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염되고 쇠사슬처럼 엮어져 반응하며, 서서히 우리의 모든 면역력과 저항능력을 파괴한다.

- 누가 세계화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까?

-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긍정적인 양자택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로부터 나온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특이성들. 그 특이성들은 양자택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규칙을 따른다. 가치 판단이나 현실 정치의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 특이성들은 최상 혹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 종교적인 교리만큼이나 교조주의적인 세계 권력은 모든 형태의 다양성과 개성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교조주의 적 논리 아래, 모든 다양성과 개성들은 좋든 싫든 간에 세계의 질서를 따르든지,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 한쪽의 일방적인 기부는 권력행사다. 선(善)의 제국, 선의 폭력성은 바로 보답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혹은 노동(하지만 노동은 상징적인 보상이 못된다. 결국 폭동이나 죽음이 유일한 대응책이다)을 빌미로 노예의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는 주인을 대신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도움을 줄곧 받아야 하는 무자비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굴욕당한 사람들과 모욕당한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세계화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테러리즘 또한 총체적인 테크놀로지, 절망적인 가상(virtuelle)의 현실, 그리고 '세계화되어' 퇴락한 모든 종과 인류의 윤곽을 그려낼 네트워크와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근간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