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관성과 시간

지하련 2009. 2. 11. 19:55


나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형성된 것은 언제부터 일까? 가령 예를 들자면, 술버릇이라든가, 말 하는 속도라든가, ... ... 실은 이것도 일종의 관성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관성 이상의 어떤 힘이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고... 특히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힘이나 에너지들은 종종 사랑의 실패, 오랜 인연의 결렬, 사소한 실수로 인한 감당하기 힘든 시련, 혹은 우연에 의한 비극 등으로 인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온 관성 속에서 어떤 변화를 시도하지만, 아주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변화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으며, 번번히 관성에 이끌려 가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볼 때,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나 결국에는 감당하고 극복해내고야 마는 어떤 실패나 결렬은 필요악이 되는 것일까?

올해 들어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부쩍하고 있다. 나와 동년배처럼 보이는 이들은 띠동갑이고, 실제 나와 동년배들은 배가 나오고 일상의 피로에 지친 아저씨이거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가진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서도.

나이가 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과연 어떤 것들에 대해서 책임 질 수 있을까? 내가 20대 초반에 만났던 어떤 이는 40 이상 먹은 이들은 이 나라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한 것은, 아마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그의 말이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 알아주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었던 그는 한참 동안을 부정 부패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젊음과 진보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아마 그도 지금은 40대 후반이 되었을 텐데...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변화는 우리들에게 모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험의 시대가 아니다. 안정적 삶에 대한 욕망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는 건, 우리가 믿어왔던 어떤 가치나 신념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를 따라 결정하고,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하거나 변명만 늘어놓게 된다.

그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실명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문화에서 실명제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 보인다.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사회는 더욱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Network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찾아 관계 맺게 한다. 개방적이라는 것도 일종의 방향성(관성)에 의해 결국은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관성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해볼 생각이다. 또한 정치적 의식, 혹은 활동이나 실천, 그리고 내 삶에 대해서도. 이제 나도 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할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