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일요일 오후

지하련 2005. 3. 6. 09:36


혼자 뒹굴뒹굴거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과는 무관한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면 익숙해질 줄 알았더니, 그렇지 못한 것이... 이런 일요일 오후엔 도대체 뭘 하면 좋을까. 새벽까지 책을 읽는 바람에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오랫만에 요리를 해서 먹을 생각에 근처 시장에 가 봄나물과 김치찌게를 위해 두부와 버섯을 사왔다. 가는 내내 봄 햇살인지 늦겨울 햇살인지 구분되지 않는 빛 알갱이들이 퍼석퍼석 썩어가는 내 얼굴에 와닿아 부서졌다. 잠시 바람이 불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장 안을 걸어가는 젊은 여자의 엉덩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엉덩이만 보면 아줌마인지 처녀인지 구분할 수 있다던데, 도통 모르겠다.

집에 들어와 이름 모를 봄나물을 간장과 고추가루가 주축이 된 양념장에 버물려 김치찌게와 함께 먹었다.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지만, 그녀는 늘 바쁘다. 오늘도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같이 밥을 먹는 경우가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이니, 같이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오늘 같은 햇살을 가진 날을 좋아하는데, 딱히 할 일이 없다. 즐거운 일도, 행복한 일도 생기지 않는다. 혼자 TV를 보며 밥을 먹었다. 아마 저녁도 그렇겠지.

어젠 어머니께서 맞선을 보라고 전화를 하셨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연애 결혼보다 중매 결혼이 낫다는 생각을 하는 시절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일반적인 종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결혼 방식이 중매결혼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 고향 집에 전화를 하니, 받지 않으신다. 결혼보다는 동거가 더 좋은데 말이다. 결혼의 책임보다 동거의 책임이 좀 더 덜하지 않을까. 그만큼 무책임한 인간이다. 결혼이든 동거든 여자가 있어야 하니, 결국은 이래저래 현실성 없는 생각이다.

오랫만에 음악을 듣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 음악 듣기. 음악을 듣고 있으니,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이럴 땐 누군가를 불러 같이 밝은 오후의 맥주 마시면서 음악 들으면 좋은데 말이다. 레코드장에서 잔뜩 레코드를 꺼집어 낸다. 먼지를 털고 턴테이블에 올려 음악을 듣는다. 음악 속에 세상이 들어가고 나는 그 밖에서 혼자 방 구석에서 뒹굴거리기 시작한다. 뒹굴. 뒹굴. 뒹굴. 뒹굴뒹굴거려 저 높은 하늘까지 훨훨.


듣기 위해 꺼내놓은 레코드판들. 왬도 있고 사랑의 스잔나도, ToTo도, 쇼팽의 녹턴, 비발디의 사계, 본 카라얀의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등등...


오래된 파이오니아 턴테이블. 구입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왬. 86년도 앨범.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의 사진이 보인다. 지구레코드에 나왔다. Where Did Your Heart Go와 Last Christmas를 들었다. Side B에 Blue가 눈에 띈다.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에서 Wham이 중국 북경 콘서트를 했는데, 그 곳에서 부른 곡이라면 소개했던 게 기억난다.


제니스 조플린이다. 멋진 그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늘 맥주를 마시게 된다. 그녀는 죽어 천당에 갔을까. 아마 갔겠지. 그녀를 죽인 건 그녀가 아니라 이 세상이니깐.


밥 딜런의 '피에 젖은 트랙'과 루이 암스트롱의 'Satchmo'다. 예전 영화월간지인 "로드쇼"에서 정성일이 밥 딜런의 이 앨범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앨범, ...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루이 암스트롱은 늘 날 즐겁게 하는 뮤지션이고.


Take Five로 유명한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앨범이다. 자켓이 재미있다.


뉴 트롤즈의 'Concerto Grosso Per 1' 과 핑크 플로이드의 '달의 어두운 부분'... 한동안 엄청 들었던 앨범들이다. 지금 이 앨범들 LP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다들 30대 중반이나 40대가 되었겠지. 

벌써 네 시 반이다. 내 어깨에서 날개가 튀어나와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남은 시간 내 어깨 속에 숨은 날개를 찾아봐야겠다. 그런데 흰 날개 대신 검은, 쭉쭉 찢어진 날개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문제가 심각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