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사

한겨레문화센터 열번째 강의 - 19세기 미술

지하련 2004. 9. 10. 11:35


19세기 - 라파엘전파, 사실주의, 인상주의.

19세기를 특징짓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찰스 다윈'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19세기의 학문이나 예술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할 때 찰스 다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19세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속에서 주인공의 이름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다윈일 정도이니, 그가 19세기 후반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치즘도 다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세기는 여러모로 양 극단을 달리는 시대이다. 이러한 분열의 증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영국이다. 영국 런던의 뒷골목은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 움막 같은 집에서 살며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만연하고 심심치 않게 근친상간이 일어났지만, 러스킨과 라파엘전파는 고매한 도덕주의자, 자연주의자,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라파엘전파를 아무리 옹호하려고 해도 빅토리아시대의 부르조아가 가지는 기만적인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라파엘전파의 여러 화가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바, 몇몇 미술사가들이 공공연하게 로제티, 번 존스, 밀레이에게 보내는 경멸의 시선을 거둘 수 없다. 다만 그들의 몇몇 작품 속에서 보이는 기만적 태도에 대한 반응을 주목할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서자 갑자기 예술가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사회적 발언이 하나의 Movement가 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며 하나의 학설이 되는 시기는 19세기가 최초이다. 이러한 일은,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때문이다. 18세기말 패트론 제도가 확실하게 사라지자,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시장에 내다놓아야만 했고 시장의 질서는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술적 성취와 시장 속 가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예술가들 중 한 부류는 계량적 논리로 무장한 시장 속에서 나의 예술은 이해받지 못한다는 공공연하게 떠들고 자신의 예술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가에 대한 논리를 추상적이며 정신적인 어떤 것들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며, 또다른 부류는 시장의 잘못된 점을 공공연히 떠들고 이 세계의 허위와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예술가의 삶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러니 자본주의 발달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19세기 낭만주의나 이후에 전개되는 사실주의, 인상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상주의에 대한 찬사는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이 미술 양식이 얼마나 불길하며 얼마나 절망적인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이 미술 양식이 속에 숨고 있는 바의 세계란, 인간이 사라진 세계이며 우리의 지성이 우리의 삶을 해명해내지고 못하고 외부세계란 그저 눈의 망막에 비친 감각적 현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는 너를 모르고 너 또한 나를 모른다는, 고독하고 쓸쓸하며 지친 '도시산책자'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미술 양식이 보여주는 비인간주의야말로 절망에 내몰린 일군의 예술가들이 쓸쓸히, 냉담하게 창 밖 풍경을 아무런 열정이나 정감없이 바라본다는 사실을, 이미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절망한 양식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보들레르가 산책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벤야민이 주목하였지만, 이 산책자의 실체란 익명의 대중을 걸어가다가 이 세상에 날 아는 사람, 날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고 말하곤 한강의 다리나 어느 지하철 역사 안에서 강물 속으로, 달려오는 전철 앞으로 몸을 던지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이야기해주지 못한다. 왜냐면 보들레르나 벤야민이나, 둘 다 19세기적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거대한 실체, 통합 이론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보편개념이 사라지고 초월적 실체가 사라진다는 건 허무와 절망 속으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던진다는 것임을 인상주의자들이 이야기해주고 있지만, 그것의 허무, 절망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상주의 예술가들을 높게 평가하면서 동시에 부게로나 제롬과 같은 얼치기 키치 예술가들의 작품을 동시에 책 속에 담고 라파엘 전파의 기만적인 양식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