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대학 시절

지하련 2009. 6. 7. 15:47


지난 주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가만히 있어도 목 둘레와 어깨가 아프다. 해야 일은 많고 내 마음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성음레코드에서 나온 팻 매쓰니의 레코드를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작고 네모난 창으로 밀려드는 6월의 축축하고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에 아파한다. 잠시 감기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혼자 있으면서 아픈 것 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아주 가끔, 이 방 안에서 내가 죽으면, 나는 분명 며칠이 지난 후에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까.

르 끌레지오의 젊은 날에 발표한 소설 '침묵'은 자신이 죽은 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현의 번역을 좋아했는데, 복사해놓은 종이는 잃어버렸고 김화영의 번역본은 어디에 있는지 서재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하긴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큼 삶에 대한 열망도 비례하는 것일 테다. 일요일 오후,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고작 육체의 고통에만 예민해져 있었다.

대학 다닐 때, 한창 문학을 공부할 때, 기형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기형도만이 내 위안으로 남아있었다. 죽은 자의 힘인가. 마치 소설가 유미리가 그녀의 사춘기를 견디게 한 힘처럼.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