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사

루브르의 그뢰즈

지하련 2009. 6. 30. 19:51



로코코 시대의 성적인 메타포가 가득찬 작품을 어수선한 루브르 미술관 안에서 보았을 때, 대단한 감동이 밀려들진 않았다. 다만 책에서 보던 어떤 작품을 실제 보았다는 것 뿐.

장 밥티스트 그뢰즈는 18세기 시민-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충실히 18세기 로코코적 여성들을 그렸다. 볼은 홍조를 띄고 창백한 피부와 마른 듯한 몸매에 성적인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현실적인(정치-경제적인) 고통과 육체적 쾌락을 대비시켰다. 하지만 루브르에서 위 작품을 보고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걸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소녀는 깨진 항아리 탓에 치마 가득 꽃을 들고 있다. 이 흥미로운 배치로 인해, 이 작품은 노골적인 로코코적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로리타 컴플렉스를 드러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미는 정반대다. 도리어 소녀의 음탕함을 보여줌으로써, 남성 관람객에게 여성의 정절을 어렸을 때부터 지키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작품의 소재로 등장한 '깨진 항아리'도 이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화가들 중, 프랑소와 부쉐, 프라고나르와 같은 화가들은 몰락해가는 귀족의 향락적인 생활(또는 현실 도피적인 세계)를 그렸다면, 장 밥티스트 그뢰즈나 샤르댕 같은 화가들은 시민-부르주아의, 개신교적 도덕률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위 작품도 퇴폐적인 로코코적 취향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시민 계급의 도덕성도 강조하는 작품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런 소녀가 저런 포즈로 앞에 서 있다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되는 건 요즘 시대에서는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무리 고결한 사랑일 지라도 말이다.




* 위 작품 이미지는 직접 루브르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