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

지하련 2009. 8. 16. 11:10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 10점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녹색평론사


정의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지음), 김종철(옮김), 녹색평론사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필요 없다. 단지 ‘읽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꼭 리 호이나키가 자신이 알고 있던 바를 성실하게, 혹자가 보기엔 무모하고 철없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이 책의 독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카페테리아의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메뉴들 ... 이런 것이 저 학생반란과 운동들의 주된 결과인가? 나는 궁금했다. ... 대학개혁을 위한 요구들은 어떠한 좀더 심각한 변화를 초래했는가?
- 11쪽


리 호이나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논리적으로 따라가면서, 그것과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경험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개선시켜나갈 뿐이다. 실은 성실한 휴머니스트라면 매우 당연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대학은 오직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뿐이며, 교수들은 오늘날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질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아는 것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다고 나는 느꼈다. 캠퍼스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치적 의도는 한 가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행해지는 교육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태평양 연안의 아름다운 숲 속에 자리 잡은 캠퍼스의 저 세련된 휴머니스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직 보여짐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일은 필연적으로 자기패배적일 수 밖에 없었다.
- 13쪽


리 호이나키의 저 지적은 미국 대학 사회가 아니라 전 세계 대학 사회에 공통되는 사항일 것이다. 실은 코미디다. 말해질 수 있는 것(What can be said)과 보여질 수 있는 것(What can be shown)에 대해서 무수한 이들이 떠들지만, 이를 실천하는 이는 거의 없다. 리 호이나키의 눈에는 대학 사회를 떠도는 담론은 유령이며, 죽은 자이고,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는 대학 사회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 마치 중세적인 어떤 삶을 실천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탐욕스런 도시 자본주의와 만나게 된다.

책은 리 호이나키의 경험, 그 경험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혹자는 저자의 박식함을 높이 평가하겠지만, 이 책이 미덕을 가진다면, 그 박식함이 아니라 저자의 일상 경험에서 지식의 의미를 구한다는 데에 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이 현실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의미나 가치도 구하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리 호이나키는 그것(지식)을 실제 경험을 통해 검증하고 가치를 구해나간다.

하지만 리 호이나키의 실천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실천의 방식이 아니다. 그도 지식인이며, 지식인 사회에서 성장했으며, 그가 의지하고 있는 어떤 앎의 체계, 또한 전문가적인 것이다. 한국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쯤 될까? 책을 다 읽고 사소한 실천이라도 감행하는 사람은?

이 책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결국 지식인 사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다. 리 호이나키가 대화의 상대로 가정하고 있는 이 또한 지식인이며, 그가 변하게 만들고 싶은 것도 지식인 사회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예부터 있어왔던 어떤 방식대로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리 호이나키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앞으로도 소수일 것이다.

한국의 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이상하게도 젊은 고학력의, 고수익의 사람들에게선 낮게 나오고, 나이들고 저학력의 저수익의 사람들에게 높게 나오는 이치와 비슷하다. 후자의 사람들이 리 호이나키같은 저자가 쓴 책을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런 저자를 만나 시몬느 베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가능성도 없다. 사회를 이미, 오래 전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어떤 이론이나 학설은 현실의 경험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누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 지식의 트렌드만 따라가는 학자와 지식인들만 있을 뿐, 그것을 경험 속에서 검증하고 실천하는 이는 없다. 리 호이나키의 책이 지식인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탐욕'이라든가, '정치적 올바름', '환경 문제, '지속가능한 성장' 따위는 그 다음 문제다. (실은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의 근본 주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