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토요일 오후, 모험을 떠나다

지하련 2003. 12. 6. 10:56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자화상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자화상

 

그 때 푼크툼은 마치 영상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 바깥으로 욕망을 내던져 버리는 것처럼, 일종의 미묘한 장외의 것이 된다. 나체의 '나머지 부분'을 향해서뿐 아니라, 하나의 실천의 환각을 향해서 그것은 욕망을 내던진다. 팔을 곧게 뻗고 빛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청년은 - 그의 아름다움은 결코 현학적이 아니고, 화면의 한쪽으로 몰려서 사진으로부터 반쯤 튀어나와 있지만 -  일종의 경쾌한 성애를 구현한다. 이 사진은 나로 하여금 포르노 사진의 욕망인 무거운 욕망과 성애사진의 욕망인 가벼운 욕망을 구별하게 한다. 결국 아마도 이것은 '행운'의 문제일 것이다. 사진가는 이 청년(메이플소프 자신이라고 생각되는데)의 팔을 조리개 구멍의 알맞은 각도와 자연스러운 밀도 속에 고정시켰다. 조리개를 단 몇 미리 미터만 더 열었거나 덜 열었더라면, 이 드러난 육체는 적절하게 제시되지 못했을 것이다. (포르노 사진의 육체는, 화면에 꽉 들어차서 나타난다. 거기에는 어떠한 관대함도 주어지지 않는다.) 즉 사진가는 적절한 순간, 욕망의 카이로스(Kairos)를 찾아낸 것이다.
-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중에서.

 

 

끝내 혼자 외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복잡하고 정신없는 도시 속으로의 외출.

 

강남 교보에 가서 화집 한 권 사고
근처 커피 숍에서 혼자 커피 마시다가
기억나는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보다가
인연이 닿으면 술 한 잔 하고 들어올 생각.
하지만 이건 바램일 뿐.

 

아마 강남 교보에 가서 화집 구경만 실컷 하다
근처에 커피숍이 몇 개 있는지 세워보고 특이한 이름을 수첩에 옮겨적어놓고선
지금은 잊어버린 여자의 이름 한 두개를
건널목을 건너다 말고 중간에 서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다
성질 급한 자동차들의 경적소리에 놀라 황급히 반쯤 남은 건널목을 마저 건너다
(이 때 자동차에 부딪혀 내 육체는 아래로 떨어져 눕고 내 영혼으로 하늘 저 멀리 구름 위로 올라가게 될지도)
'도를 믿으세요'라고 따라붙는 여인네의 손에 끌려가다
겨우겨우 도망쳐 집으로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야심한 밤 혼자 들어오다 맥주 한 병 사서 들어와선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트레>, <아이다>, <라트라비아타>, <오델로>를
잠을 자지 않고 들어야지. 그리곤 날 괴롭힌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베르디의 "오델로" 들어봤어? 잘 들어봐" 하곤
검은 스피커에 전화길 갖다 대어놓고선 나도 그 옆에서 따라 불러야지.
그럼 내 인생에 또다시 무지개가 떠오를꺼야.

 


* 푼크툼punctum : 사진의 세부로부터 화살처럼 날아와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상처입히는 우연성
* 카이로스Koiros. 그리스어로 '적절함', '적절한 균형'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