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개인적 체험, 혹은 늙어간다는 것, 무디어져간다는 것

지하련 2005. 11. 21. 21:11

개인적인 체험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을유문화사
(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으나, 이제는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귀한 전집이 되었다.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업적을 이룬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이해가 한국에서도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새로 홈페이지를 단장하면서 이전에 쓴 글을 추스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글.

히미코를 따라 소리내어 있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인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런 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히미코에겐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로 기능하고, 버드에겐 장애를 가진 아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로 기능하는, 그래서 세상은 평온 속에서 이어나가고 상처와 방황은 눈물로 스스로 아물어가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스물 여섯 쯤이었던 것같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을 읽은 게. 그 사이 서른 셋이 되었는데, 변한 게 별로 없다.

도리어 그 땐 세상이 무섭지 않았는데, 지금은 세상이 무섭다는 것.

그 땐 세상이 나의 편이 되어줄 거라 믿었는데, 지금은 세상이 적이라는 것.

그 땐 세상이 오에의 믿음대로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세상에 개선의 여지란 전혀 없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건 자신도 모르게 상처 입고 그 상처에 무디어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신이 죽어있음을 깨닫곤 몸부림쳐보지만, 죽음의 상태가 너무 오래 지나 있음을 깨닫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희망은 늘 언제나 멀리 있고 진실은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희망이 가까이있어 잡을 수 있다면, 희망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으며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진실 또한 그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건 한 없이 멀리 있는 진실과 끝내 밝혀지지 않을 진실'들'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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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어느 날 적음.


        "그런데 너나 내가 전혀 다른 존재로서 포함되어 있는,
       여기와는 다른 그 수를 알 수 없는 다른 우주가 있다는 거
       야, 버드. 우리들은 과거의 여러 가지 때에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가능성이 오십 대 오십인 추억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면 나는 어린아이 때에 발진티푸스로 까딱 잘못하면
       죽을 뻔했어. 나는 내가 죽음을 향하여 내려갈지, 아니면
       회복에의 언덕길을 올라갈지 교차로에 선 순간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너와 같은 이 우주에
       있는 나는, 살아 남는 쪽을 선택했던 거지. 그런데 그 순간
       에 또 다른 내가 죽음을 선택한거야 그리고 그 빨간 발진투
       성이의 내 어린 시체 주위에는, 죽어 버린 나에 대해 약간
       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우주가 진행되기 시작한
       거야. 있잖아, 버드? 죽음과 생의 분기점에 설 때마다 인간
       은 그들이 죽어버려 그와 관계없는 우주와, 그들이 계속 살
       아 남아 관계를 가지는 우주, 두 우주를 눈 앞에 두는 거
       야. 그리고 옷을 벗을 때처럼 그들은 자신이 사자(死者)로
       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로 하고 그들이 계속 살아
       갈 쪽의 우주로 오는 거야. 그래서 하나의 인간을 둘러싸
       고, 마치 수목의 줄기로부터 가지나 잎이 갈라지듯이 여러
       가지 우주가 갈라지게 되는 거지. 나는 지금 남편이 죽어
       버린 쪽의 우주에 남아 버렸지만, 남편이 자살을 하지 않고
       계속 살아 남는 저쪽의 우주에는 또 하나의 내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거야. 하나의 인간이 젊어서 죽어 뒤에 남기는
       우주와, 그가 죽음을 면하고 계속 살아가는 우주, 하는 식
       으로 우리들을 둘러싼 세계는 항상 증식되어 가는 거야. 내
       가 다원적 우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의미야. 너도 아기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않는 게 좋아. 아기를 축으로 하여
       분기된 또 하나의 우주에서는 살아 남은 아기를 둘러싼 세
       계가 전개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는 행복에 취한 젊은 아
       버지인 네가 기쁜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은 나와 축배를 들
       고 있는 거야. 됐어? 버드."
         - 『개인적 체험』. 85쪽에서 86쪽까지.
        
         히미코는 버드에게 자신이 말한 '다원적 우주'에 대해서
       말한다. 그건 버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녀는 또박또박 버드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기를 죽이지 않고 키우기로 결심한 버드
       의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히미코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자신의 처녀를 가지고간 첫번째 남자, 남편이 자살하
       고 난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선사해준 남자,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혀와 젖꼭지를 애무하며, 사타구
       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남자, 아기가 죽고 아내와 이
       혼한 다음 아프리카로 가자던 남자,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
       면서 히미코는 울음을 터뜨린다.
        
         『개인적 체험』이라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분명 오
       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그래서
       이전의 글에선 갓 태어난 장애아의 젊은 아버지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직 미혼의 이십대를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를 몰라도, 아기를 다시 키우기 시작한 버드의 용기
       보다 떠나는 버드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히미코의 모습이
       계속 떠오른다. 



        
         히미코의 '다원적 우주'. 그저 검증되지 못하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가끔 히미코의 '다원적 우주'를 떠올려야 할만
       큼 우린 지치고 있다. 가끔 히미코같은 여자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