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그 후, 그들의 사랑은 아마도

지하련 2009. 12. 28. 11:29

그 후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민음사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어떤 계획을 세워서 자연을 억지로라도 자기의 계획에 맞추려드는 고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이란 인간이 세운 그 어떤 계획보다도 위대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연을 거역하고 자기 계획을 고집하게 된다면, 그건 버림받은 아내가 이혼장을 방패 삼아 부부 관계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 228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된다. 적어도 다이스케에게 있어선 그랬다. 그는 자연의 이치대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무 일도 기획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으며 그냥 조용히 외부 세계와는 무관한 듯 그렇게.

 

 

다이스케는 책상 위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약간 열려있는 툇마루의 유리문 사이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와 화분에 심은 색비름의 빨간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큰 꽃 위에 햇살이 가득했다. 다이스케는 허리를 굽혀 꽃 속을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가늘고 긴 수술 끝에서 꽃가루를 따다가 암술 끝으로 가져가서 정성스레 발랐다.

- 58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무 일도 못 하리라 여겨지진 않았다. 많은 책을 읽었고 부드러웠으며 신중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의 하루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지식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종류였다. 그는 매일 차를 마셨고 책을 읽었으며 다양한 화초가 자라는 정원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달리, 자연을 따르기로 한 다이스케에게 있어 '자연'이란, 이 외부세계의 어떤 거대한 흐름 이전에 정처 없이 떠도는, 자기자신에게마저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 나무의 마음, 구름의 마음, 식물의 마음이 모여 이 거대한 자연을 이루듯, 그 시작에는 다이스케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솔직해진다는 것의 무모함이란, 자기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가져다 주는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21세기 초반의 TV 드라마들 대부분은 이 마음의 자유가 가져오는 통속적 비극에 대한 것들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이여,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말고 어른이, 이 세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생각하고 움직여라)

 

요즈음 마음이 쓸쓸하니 자주 와주세요.”라는 미치요의 말에 다이스케는 휘청거리며 100미터 정도를 걸었다.’ 마음 가는 대로 친구의 여동생인 미치요와 친구인 히라오카와의 결혼을 주선하였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마음 가는 대로 친구의 부인인 미치요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비극을 선물한다. 우리 비극의 원인은 바로 자연이다.)


 

왜 저를 버렸지요?”

라고 말하고는 다시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 대고 또 울었다.

- 286

 

 

미치요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면서 띄엄띄엄 한 마디씩 말하고 있었다. ‘너무하세요’, ‘잔혹해요라고 말하며, 지나간, 이미 버림받은 사랑을 되새기고 있었다. 친구의 아내가 된 미치요 앞에서 19세기 후반의 다이스케는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할 어떤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없어요?”

라고 물었다.

그런 건 없어요. 뭐든지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떠돌이 생활 …….”

떠돌이 생활을 해도 좋아요. 죽으라고 말씀하시면 죽겠어요.”

다이스케는 또 한번 전율을 느꼈다.

- 316

 

 

이 흥미로운 소설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사랑에 대해선 별 내용이 없다. ‘그 후이라는 소설의 잔인한 제목처럼, 현대적 비극은 막이 내려간 다음 이루어지고 그 누구도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는 데에 나쓰메 소세키는 의문을 갖는다.

 

다이스케는 19세기 후반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한 나약한 일본 지식인을 떠오르게 하며, 미치요는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일본 여성을 보여준다. 결국 둘의 사랑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이스케와 같은 지식인 류의 고백이란 늘 한 발 늦기 마련이고, 어떤 상황은 종료되고 현장은 깨끗이 치워진 이후다. 그리고 자신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순종하며 늘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고 정직하다며, 이미 끝난 사랑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붙잡곤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봐달라고 해대는 것이다.

 

 

잘 알았습니다.”

라고 다이스케는 간단히 대답했다.

너는 바보 천치다.”

라고 형이 크게 소리쳤다. 다이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얼간이 녀석.”하고 형이 또 말했다.

평소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입심이 센 놈이 정작 이런 때는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잠자코 있구나. 그리고 뒤에서는 부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나쁜 짓이나 하고 말이야. 이제까지 무엇 때문에 교육을 받은 거냐?”

- 348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나고 그 후 아무도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사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아무렇게나 그 둘은 슬픈 풍경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고 지병이 있었던 미치요는 갑자기 무능력해진 다이스케의 손을 잡으며 죽었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란 언제나 잔인하게 공평한 것이다.


그 후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