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소설의 방법, 오에 겐자부로

지하련 2010. 1. 28. 12:29

소설의 방법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노영희.명진숙 옮김/소화


하루 종일 밖을 떠돌다, 겨우 들어온 집은 아늑함을 가지지 못했다. 너무 거칠어, 마치 여기저기 각을 세운 채 모래먼지로 무너지는 사막 같았다. 어느새 내 작은 전세 집은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일 공간이 아니라, 또다른 전쟁터였고 내 마음은 새로운 전투에 임해야만 했다. 결국 도망치듯 책으로 달아났지만, ... ...

간단하게 서평을 올리고자 몇 달 전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려 했다. 몇 달 전에도 힘겹게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의 방법'. 그러나 그 때의 기억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오에의, 이 오래된 책은 낯설고 또 힘겨웠다. 내 요즘의 일상처럼.

한때 소설 쓰기를 배웠고 소설가가 된 선후배가 즐비한 지금. 심지어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들 중 2명이 나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어떤 소설들은 너무 먼 곳, 까마득히 아득한 저 어둠 속에 있어, 동년배들의 소설 읽기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늘 도전하게 되는 건 위대한 이야기꾼들. 하지만 소설쓰기를 배우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위대한 소설가들에게서 느끼는 절망은 이루 설명할 길이 없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 중 한 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풍경이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지는 나에게,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소설의 무인도와도 같다고 할까. 그의 소설들은 지극히 일본적인 산문 전통 위에 있으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해 나간다. 마치 놀라운 마법과도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 지역성이 두드러져 낯설지만, 그가 마주하며 싸우는 것은 인간과 세계, 인간과 시간(역사), 그리고 우연히 고통스러운 삶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지역성을 너머 보편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소설책을 읽는 몇 되지 않는 독자들이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들고 있는, ... ... 그러기에는 우리 시대 문학 독자의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 형편없다. 심지어 문학을 평하고 논하는 평론가들의 수준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정체 모를 안개로 왕창 내려앉아 버렸다. 하긴 위대한 문학과 싸운 경험이 있어야 평론가들의 수준도 올라갈 텐데, 한국에 언제 위대한 문학이 있었던가.

이 책은 체계적인 구조를 지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 쓰기에 한 번쯤 도전해본 이라면 이 작은 책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 시대에 소설 쓰기가 어떠한 과정과 태도로 이루어지는가를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스토리 만들기에만 몰두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스토리 너머 존재하는 표현(문체), 상상력, 이미지, 리얼리즘, 태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쓰기를 배운 이들에게조차 이 책은 딱딱하고 재미없고 지루하며 쓸데없는 내용만 가득하다고 여기게 할 지 모르겠다. 그만큼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국내 저자가 쓴 소설 작법 관련 책들 중에 이 정도 수준이 되는 책이 있기나 할까.  

진짜 문학, 진짜 소설을 꿈꾼다면, 대학 교수나 문학평론가(이론가)가 쓴 형편없는 이론서가 아니라 소설가가 쓴 이런 에세이가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 책을 집어들고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여긴다면, 이 책의 저자 오에 겐자부로나 나를 탓하지 말고 자신을 탓하길.


무엇보다도 저는 무엇을 쓰는가는 새로운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쓰는가에 관한 방법을 나타내는 식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작가가 무엇을 쓰는가의 문제까지 간섭하고 또 지도하는 것은 비문학적인 월권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젊은 독에게 이 책을 다시 보이면서 제가 제시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그 독자가 자신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대답해 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쓰는가"와 "무엇을 쓰는가"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매듭짓는가? 또 전자가 후자를 만드는가 하면, 후자가 전자를 결정하는 일도 있는, 이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를 오랫동안 계속해 온 인간으로서, 이 몽상의 신선한 의미를 의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993년 3월 1일, 오에 겐자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