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새 근원수필, 김용준

지하련 2003. 9. 12. 11:20
새 근원수필 (보급판) - 10점
김용준 지음/열화당


새 근원수필(近園隨筆)
(근원 김용준 전집 1권), 열화당



며칠이고 조용히 앉아 길게 읽을 책을 띄엄띄엄 산만하게 읽은 탓일까, 기억나는 것이라곤 오늘 읽은 술 이야기 밖에 없다.


“예술가의 특성이란 대개 애주와 방만함과 세사(世事)에 등한한 것쯤인데, 이러한 애주와 방만함과 세사에 등한한 기질이 없고서는 흔히 그 작품이 또한 자유롭고 대담하게 방일(放逸)한 기개를 갖추기 어려운 것이다.”

“술에 의하여 예술가의 감정이 정화되고, 창작심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에 있어 한낱 지대(至大)의 기쁨이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199쪽)


내가 기억나는 문장이 이렇다 보니, 인상적이었던 단어 또한 매화음(梅花飮)이었다. 뜻은 매화가 핌을 기뻐하여 베푸는 酒宴이라고 하니, 요즘 우리가 얼마나 세파에 찌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듯하다. 술이란 이렇게 자연의 기쁨에 취해 마셔야하는 것인데.

옛날에는 예술가의 가난은 응당 그러한 것이라 괴념치 않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한 듯하여 슬프다. 나 또한 가난이 두려워하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나에겐 H란 친구가 있소. H는 긴자 통에서 전차를 잡아타는 어떤 양장 미인의 각선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단번에 쫓아가서 그 여성의 다리에다 키스를 하였다 하오. H는 새로 닦은 구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면 그 매력에 취해서 때때로 핥아 보기 좋아하는 버릇이 있는 친구이지만, 이것 역시 그 신비스런 감각의 미를 느끼고자 함이 아니겠소?(전날 나는 H의 이 사건을 잡지에 발표하였다가 H에게 단단히 욕을 먹은 일이 있으면서도 지금 또 쓰는 것이요마는)
K란 친구는 미술학교 재학시대에 술에 취하여 학교 교실 벽을 뜯어 놓았고, N이란 친구는 카페에서 나체로 춤을 추었으며, R이란 친구는 술에 취하여 긴자 네거리에서 네 활개를 벌리고 춤을 추다가 신문사 카메라에 수용되었고, 나 역시 한때는 술을 먹고 ‘아바레루’(*난폭한 행동을 하다라는 일본어)한 죄로 나으리님 댁 뒷방 신세를 족히 끼친 일도 있고, 흥에 겨우면 길거리에 누워서 오고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면서 콧노래를 불러 본 적도 있으며, P란 친구는 친구들이 술을 먹으러 가잔다고 너무 좋아서 급히 내려오려는 마음에 이층 꼭대기에서 그대로 내려 뛰다가 전치 2주간을 요하는 중상을 입은 일도 있소”
(142쪽)


그러고 보면 요즘 예술 한다는 친구들은 술을 적게 하는 듯하다. 아니면 내가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러한 것일까.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예술을 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뒤샹의 ‘샘’을 배웠으면서도 돈과 권력에 종속되어가는 이들을 보면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린다’

이런 경우에 최북(催北)의 일화는 시사하는 점이 있다.


“최북은 언제든지 유리 안경을 끼고 다닌 애꾸였다. 일찍이 권세 있는 사람이 북에게 그림을 청하였을 때 응하지 아니하니, 그가 세도(勢道)로써 협박하므로 북이 대노하여 “내 몸은 오직 나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하고 눈을 찔러 한 편이 멀게 된 까닭이었다.”
(230쪽)


오원 장승업에 대한 글도 있는데 오원은,

“더구나 그림을 그릴 동안은 반드시 술이 옆에 놓여야 하고, 술이 놓였으면 반드시 미인이 그 옆에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243쪽)


라고 하니, 부럽기까지 하다.

내 정신이 천하고 내 자유가 박하여 읽는 내내 즐거웠지만, 읽고 난 다음 슬퍼지는 게 어쩔 수 없는 내 신세를 한탄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어제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일요일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싶어지니, 난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하고 술을 좋아하는 것만 타고 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