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수선한 세상 살이

지하련 2010. 10. 6. 23:15


2010년의 가을이 오자, 사무실 이사를 했다. 다행이다. 직장생활에 뭔가 변화가 필요했고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없진 않지만, 좀 더 넓은 사무실로 옮겼다.

강남구 삼성2동. 강남구청역에서 내려 높은 아파트들을 지나 근사한 빌라촌을 지나 있는 어느 흰 빌딩.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10월 초의 어느 날.

몇 해 전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던 텔런트 고 장자연의 소속사가 있던 건물 근처다. 그 건물 앞을 지나칠 때마다 사람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체계에 갇힌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혹은 치유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결국엔 세월이 약이라고들 이야기하겠지.

안 좋은 일이나 사건이 지나고 난 다음, 사람들은 곧잘 세월이 약이라고들 하지. 그런데 세월이 약일까.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문득 박인환의 시를 떠올렸다. 적절한 감상주의로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듯한 이 시는 1956년도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움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래,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다. 

마치 19세기 영국에 때아닌 고딕의 바람을 붙었던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린 채, 옛날을 더듬는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를 아프게 했던 사건을 잊어버린 채, 과거를 더듬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은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지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명확하지 못한 반대항보다 명확한 반대항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 그런 이유로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정치적 안정은 종종 스포츠의 활성화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과거 회귀란 우리의 상실감 속에서 싹트고 자신도 모른 채 십 년 전, 이십 년 전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퇴보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새 우리 행동도 보수적으로, 과거 회귀적으로, 시대 착오적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잃어버린 채, 그 어느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자기 혼자만 상처 입었다는 마음을 가진 채... 

사랑은 가고 옛날이 우리의 마음을 물들이지만, 우리는 내일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더라. 나이가 들어갈 수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