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오오누키 에미코

지하련 2005. 7. 10. 13:15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10점
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향철 옮김/모멘토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향철 옮김, 모멘토.


사사키는 다른 많은 학도병과 마찬가지로 강경한 반전론자였다. 그는 전쟁의 승리에 도취된 일본인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제 2차 세계대전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348쪽)

사사키 하치로오. 1923년생. 토오쿄오제국대학 졸업후 1943년 12월에 학도병으로 징병되어, 1945년 2월 20일 특공대원으로 지원했다. 1945년 4월 14일 특공대 임무수행 중 전사. 향년 22세. 해군 소위였다. (333쪽)



나에게 ‘카미카제’(특공대)는 2차 대전 말기 미쳐버린 일본군 최후의 발악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흐린 바다 위를 나는 프로펠러 비행기. 그리고 멀리 보이는 미군함. 날아오는 총알과는 상관없이 군함 위로 내리꽂히는 비행기. 불타는 군함.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군사적 효과는 매우 낮았고 전후 서방에 일본군 특유의 인상만을 남겨주었다. 일본 민족주의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또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경우엔 채 이 백년도 안 된다. 일본의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이 책은 근대 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해주었다.


고대 왕조는 천황이 종교.정치 쌍방의 권력자였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신권 정치였지만, 천황이 8백만이나 존재하는 신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결코 전능한 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대 왕조가 신성한 왕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애도 지나치지 않다. (173쪽)

중세 이후의 역사는 정치. 군사적으로 유력한 무사계급이 천황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의 연속이었다.(174쪽)



고려나 조선의 국왕과 달리 일본의 천황은 나라의 실질적인 지배자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거칠게 말하면 일종의 주술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천황의 자리에 오른 메이지 천황은 초반에는 실질적인 정치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 틈을 통해 이토오 히로부미, 이노우에 코와시 등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근대 일본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유럽의 여러 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해 메이지 헌법을 제정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만든다. 이에 많은 일본인들이 반대하였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실제로 강력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러-일 전쟁,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 국민들의 지지까지 얻어낸다.

만약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만큼 러-일 전쟁은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늘 중국이나 조선보다 낙후되어있었고 서구 열강들 틈 사이에서 늘 위축되어 있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일본인들의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2차 세계 대전의 전범 국가로서의 일본 권력층들의 야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쿠라꽃으로 치장한다.

사쿠라꽃이 지니는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쌀의 상응물이며 여성이고 장엄하고 화려한 사랑의 축하, 인생의 구가, 죽음과 환생으로서의 사쿠라꽃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사쿠라꽃을 사랑하고 많은 작가들이 사쿠라꽃을 소재로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이 꽃은 안타깝게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 된다. 이 책은 근대 일본이 사쿠라꽃을 통해 일반 민중들에게 그들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주입시키고 응용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 특공대원들의 수기를 통해 이를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

미적 가치는 실제 세계와 아무런 관련 없는 가상 세계에 투영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미적 가치에 대한 신봉, 가령 유미주의는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절대자로 믿어지는 어떤 존재를 위한 죽음, 사쿠라꽃이 떨어지듯이, 아름답게 죽는 것. 일종의 세뇌 과정이 있었고 그 속에서 일본인들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어떤 일들을 저질렀던 셈이다.

특공대원들 대부분은 명문 대학을 다니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엘리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도 대부분은 서양 문물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몇몇 특공대원들은 마지막 출격 전에 쓴 유서를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남긴 이들도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도 있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사쿠라꽃 아래 함께 서있었다. 투절한 애국심 따위는 없었다.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 초중반에 이르는 특공대원들은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천황을 향한 끝없는 충성으로 비행기나 잠수정을 타고 갔던 것이 아니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내일 출격날짜가 왔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애써 그 진실을 사쿠라꽃으로 포장하려고 했다. 아마 낭만주의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 특공대원들 중에는, 옮긴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16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일본인 특공대원들처럼 지금 이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

‘오인’이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개인 또는 집단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있고 또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 동일한 하나의 상징이나 의례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얻어내는 경우, 즉 전달의 오인 혹은 부재 상태를 의미한다.(16쪽)



사쿠라꽃은 하나의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사쿠라꽃(=천황) 아래 모인 이들은 서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의지한다. 미적 가치가 정치적으로 악용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일본의 사쿠라꽃이 아닐까. 청춘의 아름다움이 사쿠라꽃으로 포장되고 그들의 덧없는 죽음이 사쿠라꽃으로 피어날 때, 그들의 죽음은 보상받아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죽음 앞에선 그들은 그렇게라도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천황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종종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나 예술가들이 미적 가치만을 떠들고 있을 때, 이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허술한 짓인가를 알고서 떠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가상 세계에 대한 열정이 예술적으로는 고귀하고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실제 세계 속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소설에서 유미주의를 이야기했듯이, 그도 그러한 삶을 살았다. 그는 그가 세뇌당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미주의는 매우 ‘과격한’ 양식이다. 이는 예술 세계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 속에 투영되었을 때의 경우다. 포스트모더니즘 양식들이 보여주는 유미주의적 성향이 종종 위험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미주의, 미학주의, 이상주의 같은 것들과 정치와의 상관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책은 이 주제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을 전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 일본의 형성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려줄 것이고 미적 가치와 현실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사쿠라꽃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