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누런 먼지 같은 중년

지하련 2012. 11. 8. 17:36



어떤 기억은 신선한 사과에 묻은 누런 빛깔 먼지 같았다. 그래서 그 사과가 누런 흙 알갱이로 가득했던 맑은 하늘 아래의, 어느 과수원에서 익숙한 손길의, 적당히 성의 없이 포장되어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스테인리스 특유의 무심한 빛깔을 뽐내는 주방 앞의 아내 손길에 그 먼지는 씻겨져 흘러 내려갔다. 그렇게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다.


문득 내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15세기 중세 서유럽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한 편으론 감사하고 한 편으론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만한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어떤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시간의 틈에 끼어 오래되어 지쳐 잠들 뿐이다.그 잠든 모습을 스스로는 돌이켜보지 못하는 탓에, 예상치 못하는 사건들, 가령 거대한 도심의 새벽 거리에서 1980년대 후반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맡았던, 낡은 먼지 냄새같은 걸 느끼게 될 때, 불현듯 떠올라, 그 사이 힘들게 먹어온 나이를 무색케 만든다. 


너무 많은 생각은 정해져있는 일상의 행동마저 더디게 하고, 앞만 보고 향하던, 몇 분 전만 해도 냉정하게 빛나던 두 눈을 둔하게 하며, 축축하게 하며, 멍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저 우주는 내 앞에서 침묵으로 강요하고, 할 말 많던 나는 그 말들의 미로 속에 갇혀 혀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어느 목요일이 지나고, 라틴 풍으로 몸 단장을 한 '춘천 가는 기차'를 듣는다. 


아주 사소한 위안이 될테지. 혼자 술 마신 지도 참 오래 되었어. 음악 들으며... 



 나희경 - 춘천 가는 기차



나희경 - 흩어진 나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