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르네상스, 월터 페이터

지하련 2004. 2. 25. 14:43

르네상스 - 10점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학고재


르네상스 Renaissance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 학고재






모든 시대는 동등하다. 그러나 천재는 항상 그의 시대를 초월한다
- 월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는 르네상스 개론서라기 보다는 그의 관심을 끌었던 르네상스적 인물들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배경이나 특징, 주요 사건들이나 인물 등과 같은 르네상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구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19세기 말의 뛰어난 비평가였던 페이터의 심미안이나 그의 비평언어에 대해선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의 서문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평가 지망생들에게는 꼭 읽으라고 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지적인 만족을 위하여 미의 엄밀하고 이론적인 정의를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질적 소질, 즉 아름다운 사물에 깊이 감동 받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9쪽)

요즘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미술/음악 작품에 대한 비평문들-나이든 이의 것이나 젊은이의 것이나-을 보면 단번에 글쓴이가 이 작품에 감동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론을 위해 뛰어나지도 않은 작품들을 인용하고 분석하기도 한다.

쉽게 이런 생각을 해보자. 바로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고정시키며 영혼을 요동치게 만들고 시간을 정지시켜버린다고 치자. 그 속에서 그 아름다운 여자 앞에 선 이는 무슨 말을 할까.

아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영혼의 표면이 잠잠해질 때 한 마디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뛰어난 비평이란 이럴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리뷰를 쓰게 되는 이의 글이 '악평'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깊이 감동 받기란 드문 경우이고 감동 받기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듣게 되는데,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전시/공연 리뷰를 쓰는 일은 대체로 한국에서의 사적/공적 관계를 해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례사비평'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데 사적/공적 관계까지 해치게 되니 어떻게 '악평'을 올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제대로 감상하는 법도 모르는 비평가들이 태반인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월터 페이터는 너무 르네상스에 경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는 '르네상스는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프랑스에서 끝난다'라고 말한다. (* 이도 월터 페이터가 프랑스에 너무 빠져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그는 고딕 시기의 프랑스 이야기 두편에서 시작해 피코 델라 미란돌라, 산드로 보티첼리, 루카 델라 로비아, 미켈란젤로의 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르조네 유파, 조아생 뒤 벨레, 빙켈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빙켈만의 경우 르네상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시기적으로는 바로크 후기에 속한다. 하지만 그리스 고전 문화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르네상스적이다.

중세가 종교 중심적이라면 고딕은 종교와 세속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는 시기이며 르네상스는 세속의 승리가 최초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위대한 이교도들(무신론자들)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여기에 대한 월터 페이터의 찬사는 이 책 내내 반복해서 드러난다. 즉 경건한 신앙과 대비해서 현세에 대한 의욕적인 태도와 세속적 의식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인 셈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신화는 바로 그러한 기이한 꽃과 같아서, 그것은 성스러움과 속됨의 두 가지 전통, 두 가지의 감성이 혼합되어 피어난 것이었다."(49쪽)



* 참고로 르네상스에 전반적인 개론서로는 폴 존슨, <<르네상스>>(을유문화사)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