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알랭 투렌

지하련 2014. 4. 7. 00:08


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알랭 투렌(지음), 고원(옮김), 당대 








다소 급하게 읽은 것일까. 투렌이 이야기하는 ‘2와 2분의 1 정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미심쩍긴 하다. 실은 이런 고민할 시간이 없다. 내일은 월요일, 출근을 해야 하며, 나를 기다리는 몇 개의 회의가 있고, 내가 채워야 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도 월급쟁이인 형편에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상한 위치에 서 있으며, 똑똑하고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를 매우 싫어하는 전형적인 관리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처럼 고객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고객에게 욕을 들어가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리더의 모습을 지키려고 애쓴다.  


이런 내가 알랭 투렌의 10년도 더 지난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거나 내가 갑자기 행복해지거나 여유가 생기게 되진 않을 테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 이 책을 왜 읽은 것일까(솔직히 읽지 않은 책이 서가에 꽂혀 있으니 읽은 것일테지만).


알랭 투렌은 에필로그에서 ‘이 책은 하나의 팸플릿이 아니다’라고 적는다. 그러면서 이 책은 중립적이라고 강변한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시각이다. 비판적 시각은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기만 한 것에서 하나의 계획을 찾아내도록 자극하는 [행위자들과의] 교감에 의해 주어져야 하며, 동시에 사건 속에서 뒤섞여 있는 의미들을 구분해내기 위해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즉각적인 동의를 얻거나 인기를 모으기는 힘들다. 

- 225쪽 



책은 지극히 1999년의 프랑스적 상황 아래에서 쓰였고 그렇게 읽힌다. 공공부문 파업이 극에 달했고 좌파, 우파 정부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1999년의 프랑스 파리. 하지만 199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이 2014년 한국에서 설득력을 가진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파업이나 정치적 시위 등의 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으며, 연이은 보수 정권에 의해 공중파를 비롯한 주류 미디어까지 편향된 보도 행태를 보이는 지금, 우리가 이 책에 기대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신의 이념과 갈등, 희망들을 가로지르면서 그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곳곳에서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 21쪽 



나는 다음 세 가지 이념을 옹호할 것이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가 우리의 정치적 행동능력을 앗아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둘째, 절대적 소외계층들은 지배에 대항하는 봉기를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권리의 요구 - 특히 문화적 권리의 요구 - 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혁신적인 개념화를 통해 행동한다.

셋째, 제도적 질서가 평등과 연대에 대한 요구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이기까지 하다.

- 23쪽 



그는 전 지구화(Globalization)은 이데올로기적 공갈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는 프랑스의 극좌파들은 이 이데올로기적 공갈을 더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극좌파는 현실적인 대안 없이 공격적인 문제 제기와 투쟁을 위해 전 지구화 담론과 대항해 자신들을 위치지운다고 본다. 


그리고 알렝 투렌은 전 지구화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파편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사회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이 책에서 ‘파편화’에 대한 심도 깊은 언급은 없다. 그래서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으나, 투렌의 책은 딱 2권만 번역되었고 그 마저도 절판이었다.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건가. 프랑스 최고의 사회학자 중 한 명인데)





이 책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세 번째 비판 방식은 긍정적인 행동들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모든 표상과 싸우고 있다. 여기서는 새로운 행위자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권리와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또 오늘날 새로운 행위자들의 부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본다. 저항과 반대 세력들은 이미 낡아버린 경제적 모델 - 오래 전부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좋지 않은 결과들이 그 자체의 성장을 막아버린 모델 - 의 옹호에 몰두하기 때문에, 20여 년 전부터 약화되어 온 행동능력을 재건하는 것은 오직 이 같은 문화적 권리를 요구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들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황을 분석하고 존재 가능한 행위자들을 정의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 정책의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 

- 28쪽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행위자들에 의한 권리와 정체성,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지구화는 지배세력의 보다 고효율의 의사소통 체계를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모든 주체성과 사회적 보호와 집단 기억과 사적인 계획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로부터의 구원은 지배당하는 이들과 그들의 지지 속에서 나와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오직 노예 그 자신일 뿐이라는 생각은 헤겔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역시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바로 이들이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평등과 노동 권리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며 또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 80쪽 



결국 투쟁은 단지 지배질서에 대한 대항으로써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가치들의 이름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사회와 진보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반대했다. 자유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식민지배에 투쟁했다.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행방과 신체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운동은 사회전체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었다.

- 110쪽 



알랭 투렌. 1925년생인 그는 아직도 왕성한 활동하고 있다.



책은 짧지만, 나는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이런 책들도 계속 읽어야 쉽게 읽을 수 있는 듯), 결국 이론을 지나 실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기에 나로선 더 힘들었다. 최근 들어 나의 변화 -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고려에 하염없이 끌려 다니며,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식적인 이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현 경제 상황이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그저 지나가는 생각에 머물 뿐이었으며, 누군가와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본 적조차 없다. 이런 변화가 솔직히 나로선 황당하지만(나는 이런 시절이 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한국의 40대 대부분이 이런 상황일 것이다. 


현실 정치의 문제는 우리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나, 현실 정치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개인들은 참으로 많은 시간 투자와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한다. 어쩌면 첨예화된 기업 활동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정치적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강요함으로서 바람직인 정치의 부재를 통한 자본 이익의 극대화를 꿈꾸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알랭 투렌은 이 책에서 ‘비판적 시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결국 지배당하는 이들에 의해서 이 세계는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시간은 빼앗겼으며, 우리 스스로 행위자임을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나도 투렌이 거부하는 비관주의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부언하자면, 책의 주요 논지는 기존 좌파적 활동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우파나 전 지구화와 같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그걸 위해서우리는 투자를 해야 한다.) 


‘힐링’ 따위로 청년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창업’ 열풍으로 우리의 물질적 빈곤이나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는 불순한 이데올로기 이며, 하나는 개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면서 정부와 유관 기관들의 지원 정책으로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알랭 투렌의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어떤 실천의 어렴풋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프란츠 파농이 생각했던 것처럼,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주역 역시 식민지지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식민지인들, 다른 문화에 이미 확고하게 적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 82쪽 





어떻게자유주의에서벗어날것인가

알랭투렌저 | 고원역 | 당대 | 2000.11.06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