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질 들뢰즈: 대담

지하련 2004. 4. 5.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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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대담 1972-1990
, 김종호 역, 솔






종이 색이 뿌옇게 바래있습니다. 1993년도에 출판된 책이니, 벌써 10년이 지난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벌써 7-8년이 지난 듯합니다. 그 사이 여러 번 읽기를 시도하였지만,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겨우 오늘에서야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하긴 참 안타깝긴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istoria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미술이론가인 알베르티가 자기 나름대로 조형 예술의 중요한 특징으로 주장한 것인데, 뜻은 '극적인 주제나 장면'입니다. 알베르티는 확실히 조형 예술의 서사적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당시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사에 대한 강조가 현대 예술로 오면서 반서사, 또는 형식에 대한 강조로 바뀌어갑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는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예술가들의 부단한 노력을 배경합니다.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주제는 이 글에서 다루기는 매우 까다롭고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둘 것이 있다면 이 자율성에 대한 이해를 곡해한 나머지 모든 반서사적, 형식 중심적 아방가르드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고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아방가르드적 예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과가 과연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며 혁명적인 어떤 것을 가져오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실천적 변혁을 도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아방가르드적 예술은 예술 장champ 속에서는 충분히 급진적이며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 장 속에서 일 뿐입니다. 현실 정치 속에서는 정반대로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그렇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나 예술가들이 있기 때문에 좀 이야기를 길게 하였습니다.

제가 istoria라는 단어를 꺼낸 이유는 들뢰즈는 너무 양식에 몰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이 istoria의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였듯이 들뢰즈도 철학사의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죠. 그래서 작가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문체나 기법을 실험하듯이 들뢰즈는 개념들을 가지고 실험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 하나의 개념어는 시대마다, 철학자마다 그 방식이 틀립니다. 최근의 역사학에서는 아예 '개념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자신이 창조하는 개념을 현실 분석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학문 연구를 통해, 독서를 통해, 예술 감상을 통해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그가 자신만만하게 만들어낸 개념은 창조적이지만 비경험적이고 아름답지만 몰역사적이 됩니다. 즉 그는 철학사 속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끊임없이 예술에 주눅 든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가 거부하고자 하는 철학의 어떤 흐름과 반대 항으로 자신의 철학이나 개념을 위치 지우고 예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개념들이 얼마나 창조적인가를 증명해 냅니다. 차라리 그가 작가라고 한다면 이해해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철학자라고 버젓이 명함을 달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 이해는 동정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 세간을 보니, 들뢰즈 열풍이라고 해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유행에 민감한 것은 다 똑 같은 모양입니다. 들뢰즈 번역서를 몇 권 가지고 있는 터라 더 읽어볼 생각이지만, 제 생각에 변화가 생길 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구해서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 연구자라면 읽어야겠지만, 들뢰즈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는 건 썩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