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마리 앤 스타니스제위스키

지하련 2004. 4. 15. 23:40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6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Believing is Seeing
마리 앤 스타니스제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연구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두 번 적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적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책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다들 찬사 일변도여서 이건 아닌 것같아 여러 번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라면 원고지 10장 정도의 분량과 슬라이드 20개만 있으면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의 다섯 배 많은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러고 보면 다들 현대 미술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현대 미술을 어렵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째 자기자신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한 관계로 18세기나 19세기의 생각 방식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때문이라고 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현대 미술 비평가들이 잔뜩 어렵게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현대 비평 이론을 몰라도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런 어려운 이론이 왜 필요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작품까지 어려운 이론을 들이밀고 있으니 말이죠.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입니다. '믿는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1+1=2가 맞나요, 아니면 1+1=3이 맞나요?

다들 첫 번째가 맞다고 하겠지만, 몇 분은 왜 저린 질문을 던질까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진 의도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1,+,1,=,2, 3은 다 기호입니다. 추상적인 관념입니다. 원래는 실재하는 사물의 셈을 하기 위해 빗대어 사용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 이젠 관념만 남은 것입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그렇죠. 그러니깐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실제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좀 어렵군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1+1=2가 되고 1+1=3이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고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believing이란 하나의 규범이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입니다. 미술도 하나의 믿음(개념)이며 규범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미술(art)라는 것은'이것은 미술'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했을 때, 보이는 것만 미술로 인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고 이것은 미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저자가 예로 든 모든 것은 다 미술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 우리'가 바라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시스틴 성당 천장화)가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미술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오늘날의 의미로 미술로 인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지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술이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했을 때, 미술의 역사 또한 그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미켈란제로의 후기 걸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지금 우리가 봐도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16세기 중후반의 예술가들, 파르미지아노, 폰토르모, 로소 플로렌티노의 작품들은 무척 현대적입니다. (*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가들입니다.) 오래 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미술의 의미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그들의 작품들은 엄연히 예술 작품입니다. 현대 어느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감동적이죠.

위에서 제가 '믿음은 규범'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미술이라는 제도와 규칙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미술로 인정받기 위한 여러 규칙, 규범, 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현대 미술은 이러한 규칙, 규범, 제도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것은 진보는 아닙니다. 그저 변화일 뿐입니다. 어제 북서풍이 불다가 오늘은 남서풍이 부는 것과 같은 변화일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듯 그런 자연적인 변화입니다. 인위적인 변화도 있지만, 그것도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렇게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죠.

이러한 미술의 변화는 미술 내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미술 자체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실은 모든 예술 이론가들의 꿈이 미적, 예술적 자율성의 확보인데, 웃긴 소리입니다. 왜냐면 예술은 혼자 자족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이 아닙니다. 왜나면 예술은 예술 창작의 대상(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간에)이 필요로 하며 감상자를 필요로 합니다.

미술의 양식 변화는 미술 내의 어떤 동인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더 큰 요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 미술의 변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면 근대 생활은 개인주의 진전으로 이어지듯이 근대 미술도 개인주의화되기 때문입니다. 서명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나쁘지 않습니다. 전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을 뿐이죠.

하지만 미술사와 모더니즘의 발전,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대중매체의 창조, 오늘날의 미술과 문화에서는 순수미술은 물러나고 대중 문화를 차용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듯하여 씁쓰리합니다. 왜냐면 대중문화, 대중매체를 차용한다고 해서 그 미술 작품이 미술관에서 전시되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요. 도리어 그것은 강화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의 저급화'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즉 쓸데없는 소비자본주의적 오브제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짓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정치적 메타포를 집어넣습니다. 이건 요즘에도 통용 가능하는 방식입니다. 정치적 아방가르드 예술이 실제 세상에서 정치적 아방가르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대중들은 그것에 동의할까요? 전 매우 회의적입니다. 차라리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양식적 특징이라고 보기엔 너무 한계가 빤히 보이거든요.

뒤샹이 변기통을 가져다 놓은 이유는, 예술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반 대중에게 야, 니네들이 바로 예술가야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아카데미 미술가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었지만, 도리어 뒤샹의 변기통이 진짜냐, 가짜냐라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극복할 자신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현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여기에 대해선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한참 잘못된 논문입니다. 철저하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작성된 이 논문은 '아우라'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것 이외에는 나머지 것들은 예상을 빗나간 글입니다. 그런데 왜 이 논문을 읽는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예상보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강의 교재로 하긴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식으로 도판 잔뜩 넣은 책을 내고 싶군요. 글은 작고 도판이 많으니, 글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작을 테니 말이죠. 현대 미술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이 책에 대해서 읽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할 것은 저자의 견해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가 아니라, 개념미술과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