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12월 말의 근황

지하련 2015. 12. 27. 11:19



리뷰를 쓰진 못했지만, 가을과 겨울 사이 몇 권의 소설들을 읽었다. 루이지 피란델로의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 조나선 사프란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김연수의 <<7번 국도>>.  이 밖에도 몇 권의 책을 읽었고 짧게나마 리뷰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글은 형편 없고 독서의 질은 끝 모를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책을 읽긴 했다. 의미과 무의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독서였다. 왜 나는 갑자기 이렇게 소설책들을 많이 읽게 된 것일까. 


원하지 않는 일들이 연거푸 초가을부터 초겨울 사이 일어났다. 주말 없이 사무실에 나가고, 밤 늦게 퇴근하는 생활이 반복되었고 욕 먹으면서 일을 했다. 협력업체 직원들은 급여가 밀렸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나는, 그들의 불성실함 대신 출근하지 않는 불상사를 염려했다. 실은 이때 반대로 움직여야만 했는데, 그러질 못했고 그럴 형편도 되지 않았다.


내가, 우리 팀이 맡은 부분은 종속적 시스템인지라 타 시스템이 끝나야만 처리되는 일이었지만, 다른 시스템들은 우리와 무관하게 미궁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께서 입원하셨다. 고향에서 서울로, 다소 생소한 병명으로 송파구에 있는 큰 병원으로 와서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일을 그만둔다고 했다. 여의도 사무실과 서울 동쪽 끄트머리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몇 주간 했다. 그 사이 회사에선 나를 대신할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지 못했고 대신할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수술은 잘 끝나, 아버지께선 다소 고통스러우나, 약간의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 겨울이 왔다. 미궁으로 빨려들어가던 주 시스템 개발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프로젝트는 내가 맡은 부분만 남는 상황이 되었다. 스트레스와 부담감은 끝없이 치솟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들마저 그만 두겠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었)다. 그냥, 계속 해왔던 것처럼 욕 먹으면서 일 하는 것. 


이전 회사들을 다니면서 WLB(Work-Life Balance)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IT 프로젝트들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알려진 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에선 '일과 일상 사이의 조화'란 불가능하다, 불가능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이상한 상황 속에서 '다들 원래 이래', 그러면서 그걸 묵묵히 견디며 일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들 SM인 걸까. 얼마나 험난한 일을 거쳐왔는가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걸까. 그런 고난 거쳐 성공했다고. 뭔가 이상하지만, 나 또한 그러고 있(었)다. 


우리들의 목표, 우리들의 지향점은 어디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스무살 때는 뭔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만 든다. 대단하다고 여겼으나, 다들 평범했고 똑똑하고 영특하다고 여겼으나, 현실적 영향력은 없었다. 그저 다들 별 볼 일 없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 늦었지만, 지금 사무실로 나가 저녁에 돌아올 듯 싶다. 26일도, 27일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1월 안에 내가 맡은 이 일들이 끝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뭘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게 되고 내 일상을 망가뜨렸다. 내년 2월, 편안한 마음으로 술을 마실 수 있기를 기대해보기로 하자. 전시도 좀 보고 여행도 다니고 ... 그게 가능할련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계절 사이에서 내가 읽었던 소설들의 짧은 느낌을 덧붙인다. 


피란델로의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에선 주인공 파스칼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사랑은 잃어버렸지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던 과거의 인생과는 결별할 수 있었다. 하나의 상처는 또 다른 상처로 해소된다.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는 현대 예술에 대한 코메디이고, 사프란포어는 특유의 형식 속에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울컥하기도 했다.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저널의 찬사와 달리 약간 맥이 풀리는 느낌이랄까. 그만큼 이슬람의 문제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김연수의 <<7번 국도>>는, ... 아직도 출판되고 있다느 것이 의아스러웠다. 이십대 중반 김연수가 쓴 소설이고 형편없었다. 실은 내가 이 소설을 잘못 구입한 것이다. 


좋은 일이 뜸하다. 기쁜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