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2000년: 새로운 세계 속으로

지하련 2000. 4. 6. 21:56

1. 2000년 서울, 그리고 우리

오늘날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시드니 올림픽을 볼 수 있다. 어느 순간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라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움직이는 곳마다 감시장치가 있고 주인공은 그 감시를 한 순간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두고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이라며 몇몇 사람들은 떠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런 끔찍한 세계는 시간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IMT2000(IMT2000 International Mobile Telecommunication 2000)이라고 해서 국가간 무선통신 서비스, 화상통신서비스 등을 위한 단일 주파수, 단일 기술 표준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그러면 핸드폰마다 디지털카메라가 부착될 것이고 웃지 못할 해프닝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질 게 뻔하다. 가령 밤늦게 들어오지 않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야, 핸드폰 돌려봐" 그러면 남편은 핸드폰을 들고 주위를 한 바퀴 돌릴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누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고 남편은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함부로 술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 또는 핸드폰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도 위치추적이 가능한 마당에 그 때쯤 되면 가게 이름까지 정확하게 나올지도 모른다.

세계가 어떤 것들로 묶여질 때, 고대인들이라면 그것을 '운명(moria)'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대인들은 그것을 '정보망'이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놀랍게도 이 둘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다. 하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바깥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디지털'이라고 불리는 세계다. 고대인들이 '운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신의 영역 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세계에 대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즉 인간은 그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역이기 때문에, 육체에 죽음이 깃들기 전에는 볼 수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은 그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온갖 놀라운 생물들을 창조해내었고 무수한 신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끄트머리에 중세가 있다.

2. 1200년 유럽, 그리고 그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앙은 인류가 동굴 속에서 천둥과 번개를 두려워할 때부터, 혹은 명확하게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즉 세계가 인류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여기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인류가 희미하게나마 '지성'이라는 것을 가지게 될 때 말이다.

인류 문명의 시작은 이러한 이유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지성으로 이 세계를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가 알아 가는 건 이 세상의 '이해가능성'이라기보다는 '이해불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이해불가능성이 깊어가면 갈수록 절대자 신은 우리에게 매우 호소력있고 매력있는 대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중세란 절대자 신이, 보이지 않고 우리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를 지배했던 시기이다. 그래서 중세 유럽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 신뢰했으며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위한 그 어떤 것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신에게 있어서 의미 없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nihil cavum neque sine signo apud Deum."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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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대성당>, 서쪽 출입구

중세 고딕 성당들이 보여주는 장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모든 것을 의미 있게 하려는 노력이다. 왜냐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신의 소유물이며 피조물이기 때문에.


3. 현대 예술

현대는 중세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즉 "인간에게 있어 의미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라는 신념의 표현인 것이다. 한 십년 전쯤에 포스트모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은 의미 없는 일상을 지루하게 나열함으로서 이러한 신념을 표현했다. 그가 영향받은 누보로망의 작가들, 로브-그리예, 미셸 빅토르 등도 그러하다.

사무엘 베케트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수다스럽지만, 그들의 대사들은 다 의미 없는 것들의 나열이다. 도대체 의미 있는 것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로만 오팔카는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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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alka 1965/1-∞ Detail 1503485-1520431
(Roman Opalka, 1931- ) / 1965
Acrylic on canvas / 196×135cm

로만 오팔카는 1965년부터 일부터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위 작품은 1503485부터 1520431까지 적힌 작품이다. 로만 오팔카는 극단적 허무주의 속에서 숫자를 적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에게 의미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심지어는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가 조차도 의심스럽기 때문에 로만 오팔카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숫자를 적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어떤 물리적 대상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어떤 가상의 세계(예술작품)을 통해서 의미부여를 하려는 것이다.

4. 새로운 공화국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새로운 경제를 주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심리적 배경에는 현실 세계를 대신할 새로운 가상 세계이기 때문이다. Activeworlds(www.activeworld.com)에 들어가 보라. 그러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상 세계 속에서는 존재하는 새로운 도시를 만나게 된다. 중세인들이 보이지 않는 신에게 매달리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구원받기 원했다면 현대인들은 자발적으로 가상 세계 속으로 걸어들어가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운명'을 통해서 신을 향해 갔다면 우리들은 '정보망'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접속하고 그 속에서 새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가상 세계를 끊임없이 복제해내는 장치들이다. 현실 속의 우리 인생은 덧없고 따분하고 재미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 세계 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