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체의 녹색노트

구광렬 엮고 옮김, 문학동네 



음유시인 


             니콜라스 기옌 




알갱이가 빽빽한 옥수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부하들이 

그란마에서 내릴 때,

격정의 바다는

그들이 난폭한 걸음으로 출발하는 걸 본다 

턱수염 없는 근엄한 얼굴,

이마엔 나비들을,

구두엔 수렁, 늪을,

죽음, 군인처럼 노란 유니폼에 미제 총을 한 

죽음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으며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손가락 수보다 조금 더 많은 수가 

희망과 피로로 다시 영광을 향해 출발했다 

깨어난 길에선 주먹을 움켜쥐고 

양귀비를 따 노래를 불렀다 

칼날은 빛났으며 총은 번쩍거렸다 

마침내 산속으로 먼저 들어간 

피델 카스트로는 병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에서 내려간다.

평원은 총들의 바다가 될 것이다."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 사망 당시 그가 메고 다녔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연필로 덧칠이 된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두 권의 비망록은 사후 '체 게바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는데, 나머지 노트 한 권은 시가 빼곡히 적혀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40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노트 속의 시 69편이 밝혀졌다. 바로 체 게바라가 좋아했던 네 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 니콜라스 기옌Nicolas Guillen, 레온 펠리페Leon Felipe의 시들이었다. - 6쪽 


번역자인 구광렬 교수는 체 게바라의 노트에 빠졌겠지만, 나는 세사르 바예호 때문에 이 책을 샀다. 


예전, 어느 프랑스 소설에서 '세자르 발레조'로 옮겨진 그를 읽었고 그 페루 시인의 시를 읽고 싶었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은 흐릿해지고 시집은 일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시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할까. 특히 영미시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그리고 잊고 있던 세사르 바예호를 떠올렸다. 혹시 싶어 찾아보았으나, 한 권은 절판되었고 구할 수 있는 건 이 책이 유일했다. 



XV

-<<트릴세>>에서 



세사르 바예호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저 모퉁이,

하지만 지금 나, 걷기 위해 앉아 있네.

죽은 연인들의 침대는 누가 빼버렸을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넌 조금 전 다른 일로 여기 도착했지.

지금은 없구나. 네 곁에서,

네 허벅지 사이에서 밤을 읽고 

알퐁스 도데의 이야기를 읽었건만.

혼동하지 마, 

이 사랑하는 모퉁에서였잖아.


지난 여름날을 생각해,

작고 창백한 얼굴로

이 방 저 방 드나들던 너를.


비 내리는 이 밤, 

우리 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열렸다 닫히는 두 개의 문,

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그리고 그림자 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안목으로 선택된 네 명의 시인을 우리는 새로, 다시 만난다. 쿠바를 떠나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남미의 숲 속에서 노트를 꺼내 이 시들을 읽었을 체 게바라를 떠올리면, ... 어떤 시들은 가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같다고 할까.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지금, 무참하게 내려누르는 일상의 공포, 책임, 무모함 속에서 시집은 작지만 강한 위로가 된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너무 아름다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이 겨울의 아침, 언어가 가진 슬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쓸쓸한 마음을 잠시 스스로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에게나 추천해도 좋을 시집이다. 


** 


2015/03/04 - [책들의 우주/문학] - 죽은 전원시, 세자르 바예호







Comment +0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형태의 삶 Vie des Formes 앙리 포시용 Henri Focillon (지음), 강영주(옮김), 학고재, 2001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책은 책을 따라간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지음), 김성곤(옮김), 비채 원제는 <Revenge of the Lawn>이지만, <잔디밭의 복수>.....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면도,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면도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Antonis Samarakis (지음), 최자영(옮김), 신서원, 1997 전후 그리스 소설이 번역된 것이 드물었던 탓에 1997년에는 꽤 주목받았.....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Close Range: Wyoming Stories 애니 프루Edna Annie Proulx(지음), 조동섭(옮김), media 2.0,2006년 잭이 말했다.....

하룬 파로키 Harun Farocki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Harun Parocki - What Ought to Be Done? Work and Life 6, 7 전시실 및 미디어랩 국립현대미술.....

회화의 이해, 리오넬로 벤투리

회화의 이해 Pour Comprendre La Peinture (Painting and Painters) 리오넬로 벤투리 Lionello Venturi (지음), 정진국(옮김).....

어지러진 자취방 구석에 놓인 낡은 턴테이블 위로 레코드판을 올릴 때,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뱉었다. 맥주를 한 잔 마셨고 짐 모리슨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러던 시절이 있.....

인생의 발견, 시어도어 젤딘
텅빈 주말의 사소한 희망
콘텐츠의 미래, 바라트 아난드
콘텐츠의 미래, 바라트 아난드
콘텐츠의 미래, 바라트 아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