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하련 2018. 12. 8. 20:31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지음), 김성곤(옮김), 비채 



원제는 <Revenge of the Lawn>이지만, <잔디밭의 복수>보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가 더 나아보인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하지만 이 책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단편은 <잔디밭의 복수>.


잭은 할머니와 30년이나 같이 살았다. 내 친할아버지는 아니었고 플로리다에서 물건을 팔던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잭은 사람들이 사과를 먹고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영원한 오렌지와 햇볕에 대한 비전을 파는 사람이었다. 

잭은 마이애미 다운타운 근처에 있던 할머니집에 물건을 팔러 왔다. 그는 일주일 후 위스키를 배달하러 왔다가 30년을 눌러 살았으며, 그 후 플로리다는 그 없이 지내야 했다. 

- <잔디밭의 복수> 중에서 

(* 위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브라우티건은 사물의 관점에서 종종 서술하는데, 꽤 흥미롭다. '플로리다'(지명)를 의인화하여 '그'(잭) 없이 지내야했다'고 표현한다.)




아주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브라우티건의 소설집,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연작처럼 읽히기도 하고 산문으로 된 시같기도 하며, 그냥 수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소설이다. 


브라우티건은 이제 잊혀져가는 이름이다. 육칠십 년대(히피들의 시대) 활동했던 미국 소설가. 


반-문명, 반-도시적 감수성을 가졌다고 해서 김성곤 교수는 '생태문학'으로 몰고 가지만(히피 시대가 생태주의 시대였는지도), 실은 문명 안에서, 도시 안에서, 쓸쓸함, 외로움, 고독을 어쩌지 못해, 버림받았다는 당혹스러움이나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이 몰려들어 그 공간 - 문명 속의 도시 - 를 비틀고 조롱하며, 급기야는 고개를 돌리고 피하고 도망쳐서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하필 그 곳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숲이거나 강가라고 해서 '생태문학'으로 일반화시키면,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죽기 직전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이 매우 섭섭해 할 것이다. (*나도 한 번 브라우티건을 따라서...)


여자들이 검은 고무 잠수복과 광대 같은 모자를 착용하니까, 참 예뻤다. 수박을 먹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캘리포니아의 왕관에 박힌 보석처럼 빛났다. 

-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건 짧은 글 속에 숨겨진 문명/도시에 대한 조롱, 무책임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폭로를 넘어서 서정적이면서도 단조롭고 견고한 산문 때문이다. 하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알고 읽는 독자는 드물기만 하고.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어디론가, 저 멀리 휩쓸려 떠내려가는, 질서와 합리성으로 포장된, 위선적인 도시의 비정한 일상 속에서 브라우티건을 읽는 건, 브라우티건을 손에 들고 다니는 건 상당히 우습고 위험한 일이다. 다행히 수십 년 도시 생활 중에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들고 있는 이는 본 적 없으니, 아직 이 도시에는 도시를 극도로 싫어하는 반-도시적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니, 도시는 아직 안전하다(하지만 나는 도시가 싫다).


핏빛 다툼 


"바이올린을 배우는 남자와 새너제의 원룸에서 같이 사는 건 정말이지 힘들답니다." 그녀가 탄창이 빈 연발권총을 경찰에게 건네면서 한 말이었다. 


(번역: 김성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은 도시에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문명의 불빛에. 


나무들은 한 때 공동묘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낮의 울음과 술픔의 일부였으며 바람이 불 때를 제외하고 밤의 정적의 일부였다. 

- <소녀의 추억> 중에서 



- 1970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아파트 욕조에 앉아 있는 브라우티건


- 1971년에 나온 <잔디밭의 복수> 초판본 표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 




그건 마치 종교음악처럼 들렸다. 내 친구 하나가 막 뉴욕에서 돌아왔는데, 거기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가 그의 작품을 타이핑해주었다고 했다. 

그는 성공적인 작가였고, 그래서 뉴욕에 가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를 만나 타이핑 서비스를 받는 최상의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고, 허파에 침묵을 대리석처럼 수놓을 만한 일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라니!

그녀는 모든 젊은 작가들의 꿈이었다. 마치 하프를 타듯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 원고를 바라보는 완벽하고 강렬한 시선, 그리고 심오한 타이핑 소리.

그는 시간당 15달러를 지불했다. 그건 배관공이나 전기공의 보수보다도 더 많은 액수였다.

타이피스트에게 하루에 120달러라니!

그는 그녀가 모든 것을 다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저 원고를 넘기기만 하면 그녀가 철자 점검이며 구두점을 너무나 아름답게 처리해서 그걸 보면 눈물이 나게 되고, 그녀가 만든 문단은 우아한 그리스 신전처럼 보이며, 그녀의 문장은 완벽했다고. 

그녀의 헤밍웨이의 소유였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였다. 


(번역: 김성곤) 



아, 그런데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라니! 나는 너무 부럽기만 했다. 그렇게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읽었다. 



* 위에서 인용된 두 편의 단편, <핏빛 다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는 단편 전체다. 그래서 밑에 역자를 표기하였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 10점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