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지하련 2019. 2. 7. 23:58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폴 칼라니티(지음), 이종인(옮김), 흐름출판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

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

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

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

Reader! then make time, while you be,

But steps to your eternity

- Baron Brooke Fulke Greville, "Caelica 83"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책 읽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의사에게 닥친 죽음의 선고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시한부 암 선고를 받았던 때도 떠올랐다. 그것이 어머니와 우리 가족에게 긴 터널같은 것임을 그 땐 미처 몰랐다. 아무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암과의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라 여겼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의료시스템과 의사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 책은 신경외과의사였던 폴 칼라니티가 죽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의사와 죽음에 대해 쓴 책이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자서전쯤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러기엔  폴 칼라니티는 자신의 인생보다는 그 인생을 가능하게 했던 자신의 생각, 태도, 그리고 가족과 우정, 그가 경험했던 의사들에 대해 진실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왜 이런 사람은 이렇게 일찍 죽는 것일까 하고 반문하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감동적이며 울림이 큰 책이다.  



"자, 클레어." 외과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보이는 것처럼 정말 안 좋은가요? 아이의 어머니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암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물론 당신도 잘 알겠지만, 당신의 삶이 이제 막, 아니, 이미 변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기나긴 싸움이 될 거예요. 남편 분도 잘 들으세요. 서로를 위해 자기 자리를 잘 지켜줘야겠지만 필요할 대는 꼭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이런 큰 병을 만나면 가족은 하나로 똘똘 뭉치거나 분열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해요.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침대 곁에서 밤을 세우거나 하루종일 병원에 있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시겠죠?" 

- 93쪽 ~ 94쪽 



칼라니티가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하기 직전 본 풍경. 그리고 그는 신경외과를 선택한다.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리처드 로티(우리가 알고 있는 그 로티Rorty!) 교수에게서 영문학 석사를 마친 후, 그는 의과대학원으로 가 의사가 된다. 



진지한 생물학적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도덕적인 명상은 도덕적인 행동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 66쪽 



의학을 배우고 의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제프 말이야. 자살했대."

"뭐?"

제프는 중서부의 한 병원에서 외과 특별 연구원 생활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우리 둘 다 정신없이 바빠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 나는 제프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 복잡한 문제가 있었나봐. 게다가 담당 환자도 사망했고. 어젯밤에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렸대. 그 이상은 나도 몰라."

- 141쪽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이며, 의사들은 그것에 너무 깊숙하게 개입해 있는 존재였다. 가끔 의사들을 볼 때,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하는 건 아닐까 의심을 품기도 하지만, 칼라니티는 그렇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제프와 나는 몇 년 동안 죽음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마치 천사와 씨름한 야고보처럼 죽음과 씨름하는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대면하려 했다. 우리는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을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멍에를 졌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 142쪽 ~ 143쪽 



그런 칼라니티가 암 선고를 받고 죽어가며, 자신의 담당 의사와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죽음을 준비해 나가는 모습은 놀라움을 전해준다. 결국 이 책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그의 아내 루시 칼라니티의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2015년 3월 9일 월요일, 폴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 침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8개월 전 우리 딸 케이디가 태어난 분만 병동에서 2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누군가는 케이디가 태어나고 폴이 숨을 거둔 그 사이에 동네 바비큐 식당에서 우리 식구를 보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검은 머리에 긴 속눈썹을 가진 아기가 유모차에 탄 채 졸고 있는 동안, 맥주 한 잔을 나눠 마시고 갈비를 뜯으며 서로에게 미소 짓던 우리 부부를 본 사람은 폴이 앞으로 살 날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걸, 또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237쪽 ~ 238쪽 


 



강력하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은 늘 그렇듯 믿을 만하다. 



칼라니티는 이 책의 서시로 영국 시인 그레빌 남작(1554 ~ 1628)의 시 <카엘리카>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레빌 남자이라고 하면 곤고한 인간의 생존 조건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남작은 인간이 하나의 법률(정신) 아래 태어났으나, 다른 법률(육체)에 매인 존재이며, 허영 속에서 태어났으나 허영을 금지당한 존재이며, 병든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건강하게 살아갈 것을 명령받은 모순적 존재라고 설파했다. 이 말처럼 폴 칼라니티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 따로 있을까? 뇌의 기능을 그처럼 진지하게 연구했으나, 결국에는 뇌가 암에 의해 파괴되었고, 인생의 의미를 그토록 알아내려 했으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뒤에 남겨놓고 혼자 떠나가야 했으며,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죽음에 붙들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 280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레빌 남작의 영문시집을 사서 읽어볼까 한다. 쉽진 않겠지만. 





숨결이 바람 될 때 - 10점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흐름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