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낭만적인 자리, 이영주

지하련 2019. 2. 14. 19:31



도서관에서 시집을 꺼내 읽는다. 어느 토요일 오전. 가족 몰래 나온 도서관. 가끔 가서 책을 빌리는 동작도서관 3층. 어색한 시집 읽기다. 한 때 시인을 꿈꾸기도 했지. 그러게. 요즘 시들은 어떤가. 문학상 수상 시집을 꺼내 읽는다. 한 시가 눈에 꽂힌다. 이영주다. 예전에도 이 도서관에서 잡지에 실린 시를 읽고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지. 하지만 그녀의 시집을 사진 않았어. 이번엔 사야 하나. 길게 마음 속으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시를 노트에 옮겨 적는다. 몇 개의 계절이 지난다. 지났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고, 나는 출근을 했다. 그리고 밤이 왔다. 시를 블로그에 옮겨적는다. 그러게 이번엔 이영주의 시집을 사야 하나. 이번엔 짧게 고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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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있다. 형태를 만져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십 년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곳은 얼마나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거지. 그의 다리에서 생생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가 뿌린 흙 위에 나는 서 있다. 이곳은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난다. 잠깐 동안 그는 앉아 있었는데, 동그랗게 어두워지는 자리였다. 내가 어지러워 돌처럼 흘러나가는 자리. 소파에 앉아서 그는 흩어진 잔해들을 본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집이라는 집은 없다. 고향이 없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치지. 


- 이영주, <<간발 -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