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아메리카의 망명자, 아리엘 도르프만

지하련 2019. 6. 30. 11:57


아메리카의 망명자 

아리엘 도르프만(지음), 황정아(옮김), 창작과비평사 



1973년, 자신을 고국인 칠레으로부터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던 파리로 도망치게 만들었던, 칠레를 깊고 긴 독재 국가로 변하게 한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의심되던 망명지 국가에 정착하게 된 아리엘 도르프만은 어떤 기분일까. 민주화된 칠레 대신 미국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정착하게 되는 칠레. 그러나 민중을 위한 희망을 안고 하나둘 칠레를 일으켜세우던 아옌데 대통령은, 이를 방해하는 미국과 글로벌 대기업의 모략 앞에서 힘겨워 하다(아옌데 대통령 집권 이후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악화된다) 결국 그들의 지원에 힘입은 삐노체트와 그의 군대가 일으킨 쿠데타에 저항하다가 끝내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그를 지지하고 도왔던 젊은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위험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칠레에서 떠나게 된다. 이 책, <<아메리카의 망명자>>에서 아리엘 도르프만은 그 어쩔 수 없었던 도피로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하며, 망명지에서의 만남들과 사건들, 그리고 그 사이 칠레에서 벌어진 일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희망, 문학, 가족, 동료과의 기억을 회고하며 끝내 미국에 정착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되새긴다. 


시간과 망명에 관한 메모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일평생 나라를 세번이나 잃었으므로, 인간이란 존재에 으레 동반되는 자기성찰의 노력이 내 경우에는 숱한 도착과 귀환과 출발이라는 분절을 통해 자라나고 성숙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모든 기억하는 행위, 모든 회고록이 맞닥뜨리기 마련인 자연적인 복잡함이 한층 가중되었다. 육체로만 보면, 그리고 출생, 결혼, 사망, 비자, 세금환급, 추방, 신분증 같은 것을 기록하는 관료에게는, 삶이 연대순으로 펼쳐질지 모르지만, 기억은 그런 식으로 게임을 하지 않고 말끔함을 향한 욕망을 늘 어떻게든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기억의 미궁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길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싸움을 따라가느라 혼란을 느낄 독자를 위해 마지막에 주요 사건들을 얼추 순서대로 맞추어 놓은 연표를 덧붙였다. (9쪽) 



책을 펼치면 마주하는 <시간과 망명에 관한 메모>에서부터 문장은 무겁고 신중하며 표현 하나하나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그만큼 그 시절을 회고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어려웠던 일이었을 게다. 그 자신은 운 좋게 살아남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가 되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잘 성장하였고 자신의 고국, 한때 독재 치하의 고통스러웠던  칠레도 이제 평화로워 보이니, 그 회고가 조금은 편하지 않았을까. 그의 희망대로 칠레에 정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칠레에 정착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칠레 역사 상 최초 여성대통령이며, 39대, 41대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했던 미첼 바첼레트가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이 책은 망명자의 어떤 아픈 회고를 담게 된다.  오랜 세월 타국을 떠돌았던 망명자가 고향에 대해 꿈 꾸는 것과 고향이 변해가는 건 전혀 다를 것이니, 그리고 이미 그의 세대는 지나고 이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아리엘 도르프만은 칠레 대신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을 지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왜 아리엘 도르프만이 미국에 남게 되었는가를 한 번 묻는 것도 흥미로운 접근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쓰는 일이 내 치유과정이었고 내 삶이 어떤 모습이 되었는가에 대한 미 울띠마 빨라브라, 내 마지막 말이다. 이 페이지들은 이제 그만 되돌아보기 위해 되돌아보는 시도이고, 말로 만들어진 묘지에서 마침내 누워 안식하려는 시도다. 내 안에 있는 서글픈 어떤 것이 편히 잠들기 위해서는 과거에 제대로 된 장례를 지내주어야 한다. 

나와 더불어, 그리고 서로와 더불어 평안해진 내 두 언어처럼. 

비록 매번의 화해가 힘든 순간을 동반하고 무엇을 바라야 할지 조심해야 하지만. 

(464쪽) 



책은 생각보다 쉽게 읽지 않지만, 이 책이 정치적 박해로 인해 떠나게 되는 망명객의 삶, 그리고 그들의 희망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또한 아리엘 도르프만, 우리에겐 다소 낯설지만 20세기 후반 라틴 아메리카가 낳은 최고의 작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fiction-this-week-ariel-dorfman-2015-11-02





아메리카의 망명자 - 10점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황정아 옮김/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