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스크린의 추방자들, 히토 슈타이얼

지하련 2019. 10. 6. 22:23


스크린의 추방자들 The Wretched of the Screen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지음), 김실비(옮김), 김지훈(감수), 워크룸프레스 




1. 

책을 사두고선 읽지 않았다. 현대예술에 대한 책이라는 걸 알았지만, 영화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일 거라는 추정과 다소 투박하게 읽혔던 몇몇 문장들로 인해, 그리고 다른 책들과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려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한은형의 수필집에서 히토 슈타이얼이라는 흥미로운 예술가의 이름을 발견한다. <Lovely Andrea>(2007)라는 작품에 대한 짧은 글 속에서 나는 이 작가를 찾았다. 그런데 이런, 나는 뒤늦게 최근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가들 중의 한 명이며,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로 거의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을.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책의 저자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2.

이미지와 스크린이 현실과 의식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이를 생산한다면, 슈타이얼은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형식 전환과 일탈적 왜곡에서 풍부한 정보를 수확한다. 이는 자본주의 저변의 명백한 지지 구조를 식별하고, 그 재료에서 일종의 마술적 즉각성을 해방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비물질적, 추상적 흐름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홀리에타 아란다, 브라이언 콴 우드, 안톤 비도클레, <들어가며>, 7쪽) 


그러나 자본주의로 히토 슈타이얼의 글이나 작업을 연결 짓는 것은 일부만 타당하다. 동시에 히토 슈타이얼의 행위들-글쓰기나 작업들-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적 참여로만 국한시킨다. 그녀의 작업들과 성찰들은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다양한 매체의 등장, 그리고 그것들의 유통과 소비까지 언급하면서 우리에게 지금/여기의 비판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었다. 특히 디지털 매체에 대한 그녀의 작업은 다양한 영역에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3. 

히토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는 너무 유명해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녀는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시하며, 디지털 매체 속으로 들어온 자본주의의 실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마치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이 '아우라의 상실'로 새로운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고 희망하듯(결국 그의 생각대로 예술은 흘러가지 않았지만), 히토 슈타이얼 또한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는 움직이는 사본이다. 화질은 낮고, 해상도는 평균 이하, 그것은 가속될수록 저하된다. 빈곤한 이미지는 이미지의 유령, 미리보기, 섬네일, 엇나간 관념이다. 그것은 떠도는 이미지로서 무료로 배포되고, 저속 인터넷 연결로 겨우 전송되고, 압축되고, 복제되고, 리핑되고(ripped), 리믹스되고, 다른 배포 경로로 복사되어 붙여넣기 된다. 

빈곤한 이미지는 허접쓰레기 또는 리핑된 것(rip)이다. AVI나 JPEG 파일, 해상도에 따라 순위와 가치가 매겨지는 외양의 계급사회 내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다. 빈곤한 이미지는 업로드되고 다운로드되고 공유되고 재포맷되고 재편집된다. 그것은 화질을 접근성으로, 전시 가치를 제의 가치로, 영화를 클립으로, 관조를 정신분산으로 변환한다. (41쪽)


빈곤한 이미지는 동시대 스크린의 추방된 존재(the wretched)이며 시청각적 제작의 잔해이자 디지털 경제의 해변으로 밀려온 쓰레기다. 그것은 이미지의 급격한 위치 상실, 전이, 변위를, 즉 시청각적 자본주의 하에서 악순환하는 이미지의 가속과 유통을 증명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상품 혹은 상품의 모형으로서, 공물이나 현상금으로서 지구를 떠돌아다닌다. 그것은 쾌락 혹은 죽음의 위협을, 음모론이나 해적판을, 저항 또는 무능력을 유포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희소한 것, 명백한 것, 못 믿을 것을 제시한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해독할 여지가 있을 때에만. (42쪽)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빈곤한 이미지의 순환은 전투적이고 (간혹) 에세이적이며 실험적인 영화의 야망을 이룰 회로를 만들어낸다. 즉 이곳에서는 상업적 매체 전송의 안팎과 물밑에서 존재하는, 이미지의 대안적인 경제를 창출하고자 한 불완전 영화의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파일 공유의 시대에는 주변화된 내용조차도 재순환하며, 지구상에 분산된 관객들을 연결한다. 

따라서 빈곤한 이미지는 익명의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마찬가지로 공유된 역사를 창조한다. 이동함에 따라 동맹을 만들어내고, 번역 혹은 오역을 이끌어내며, 새로운 공중과 논쟁을 창조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자신의 시각적 실체를 잃음으로써 일말의 정치적인 가격을 회복하고, 새로운 아우라를 부여한다. 이 아우라는 더 이상 ‘원본’의 영원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본의 무상함에 발 딛고 있다. (56쪽)


4. 

간단한 명제로 시작해보자. 작업(work)이었던 것은 점차 직업(occupation)으로 전환되었다. 

이 용어 변화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은 작업에서 직업으로 변하면서 거의 모든 것이 변모한다. 경제적 틀과 함께, 공간과 시간성의 함축도 변모한다. 

작업을 노동으로 간주하면, 이는 시작을, 생산자를, 그리고 종국에는 결과를 시사한다. 작업은 주로 상품, 대가, 또는 봉급과 같은 목적을 향한 수단이 된다. 그것은 도구적 관계이다. 이는 또한 소외를 수단으로 하여 주체를 생산하다. 

직업은 반대다. 유급 노동을 시키는 대신 사람들을 분주하게 만든다. 직업은 아무 결과와도 연관이 없다. 거기에는 딱히 결론이 없다. 그래서 전통적인 소외도, 이에 호응하는 주체성의 관념도 알지 못한다. 직업은 그 과정이 만족감을 담보한다고 여겨지기에 꼭 임금을 전제로 하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흘러가는 시간 자체 외에 시간적 틀도 없다. 직업은 생산자나 노동자에 중점을 두지 않으며 소비자, 재생산자, 심지어 파괴자, 시간낭비자, 그리고 방관자를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여흥이나 몰두할 것을 찾는 모든 이들을 포함한다. (137쪽 ~ 138쪽)


직업은 활동, 봉사, 여흥, 치료, 열중에 연결된다. 그러나 정복, 침공, 장악과도 연결된다. 군대에서 점령(occupation)은 극단적인 권력 관계, 공간적 문제, 그리고 3D 통치술을 가리킨다. 점령자가 피점령자에게 시행하며 후자는 저항하기도, 하지 않기도 한다. 목적은 종종 확장이지만 중립화, 압박, 자율성의 제압이기도 하다. (138쪽) 


역사상 미술가, 혹은 예술가가 가장 많았던 시대를 이야기하라면, 단연코 현대가 될 것이다. 그 전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특히 베네치아와 피렌체가 되겠지만, 그 때 그곳도 현대의 여러 도시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만 하더라도 백 개 이상의 갤러리에서 수백 명의 예술가들이 매주 전시를 열고 있지만, 그들 중 우리가 아는 예술가들은 채 몇 명 되지 않는다. 예술가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이, 거리가, 도시가 예술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예술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면서 한 편으론 뭔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건 왜일까. 


히토 슈타이얼은 작업을 직업으로 연결지으면서 현대 예술이 마주한 현실을 분석하며 비판한다. 


5. 

미술계는 거친 모순과 경이로운 착취의 공간이다. 권력에 대한 탐닉, 투기, 금융공학, 거대하고 비뚤어진 조직의 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공통성, 운동, 에너지, 욕망의 현장이다. 가장 긍정적인 경우, 미술계는 유동적 파업노동자, 떠돌이 자기 영업자, 기술 신동, 저예산 사기꾼, 초고속 번역가, 박사과정 실습생, 기타 디지털 부랑자와 일용직 노동자의 국제적 각축장이다. 지능적이고, 예민하고, 현란하다. 경쟁에 거침이 없고 연대란 그저 낯선 표현으로 남는, 잠재적인 공유지이다. 매력적인 인간 쓰레기, 비열한 텃세의 왕, 되다만 미모의 여왕이 사는 곳, HDMI, CMYK, LGBT, 허세적이고, 유혹적이고, 최면적이다. (135쪽)  


그래서 현대 미술계에 종사한다면, 히토 슈타이얼의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리고 히토 슈타이얼의 여러 견해들에 대해 격하게 공감하지 않는다면, 현대 미술이 마주한 여러 질문, 곤경, 이슈들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될 것이고, 동시에 현대미술계에 종사하고 있음에 대해 스스로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반대로 뒤늦게 이 책을 읽음을 후회하고, 이젠 미술계 밖으로 밀려났지만, 자본주의의 난장판이 된 현대 미술의 한 쪽 끝에선 아직도 치열하게 전쟁 중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히토 슈타이얼의 팬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6.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빗나간 전망이자 성찰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인생이 예술이길 바라는 비극적인 희망론같은 글이었다. 그래서 고작 '아우라'나 '복제'의 개념만 언급하기 위해 이 글을 인용하는 이들을 상당히 경멸하였다(지금이야 경멸하지도 않지만). 하룬 파로키의 전시를 보고 Youtube에서 영상을 찾아 블로그에 옮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되었다. 실은 저작권 문제로 삭제당한 것이다. 벤야민의 전망에 의하면 복제로 아우라는 사라져야 하는데, 반대로 복제가 일상화된 디지털 시대, 아우라는 더 강화되고 복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해적판만 돌아다닌다.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을 Youtube를 통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이 아티스트 토크나 인터뷰. 그래서 아래 영상이라도 블로그에 옮겨놓는다. 






스크린의 추방자들 - 10점
히토 슈타이얼 지음, 김실비 옮김, 김지훈 감수/워크룸프레스(Workr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