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하련 2020. 1. 11. 17:32





정체성 L'Identite'

밀란 쿤데라(지음), 이재룡(옮김), 민음사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쿤데라 특유의 문장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간 읽었던 그의 소설들과 비교한다면 읽는 재미가 다소 떨어진다고 할까. 어쩌면 내가 그 사이 나이 든 탓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상당히 오래 전 일이니(찾아보니, 거의 십 년만이다). 



꿈은 한 인생의 각기 다른 시절에 대한, 수용하지 못할 평등성과, 인간이 겪은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는 동시대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꿈은 현재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며 현재를 무시한다. (9쪽)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꿈을 꾼다. 샹탈도 꿈을 꾸고 장-마르크는 그 꿈을 위해 익명의 편지들을 그녀에게 보낸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현재는 부서지고 사랑도 무너진다. 소설의 마지막 챕터는 무너진 사랑에 대한 꾸며진 그림처럼 느껴졌다. 과거는 지워질 뿐 회복되지 않는다. 사랑은 한 때이며, 잊혀진다. 흔적으로만 남아 서로의 위안이 될 뿐. 


꿈이 현재와 만날 때, 그 꿈은 조롱받고 멸시당하며 버려진다. 꿈결같은 사랑도 마찬가지. 그런 사랑은 끝내 버림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자들이여, 현재를 즐겨라. 그리고 그 현재가 늘 바라던 꿈이라 여겨라. 


하긴 내가 이 작은 공간에서 떠들든 말든, 사랑에 빠진 이들은 충분히 지금을 즐길 것이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한때 그들이 누렸던 사랑이 꿈이었음을 깨닫고 헤어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일 것이다. 

 

연애소설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샹탈도, 장-마르크도, 나도, 너도, 우리도 두려운 것이다. 지금 이 사랑스러운 현재가 사라져 가는 것을. 지금의 내가, 내 앞에 있는 지금의 네가. 그가, 그녀가. 


기대한 것만큼 재미있지 않다. 주인공들의 마음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너무 혼란스러웠고 아름답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교훈적이지도 않았다. 소설이 모두 아름답거나 교훈적일 필요는 없지만, 소설의 설정, 즉 장-마르크가 익명의 편지를 쓴다는 것 자체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작은 시작은 참 부질없다. 어쩌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에 장-마르크처럼 실수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애초부터 꿈을 꾸지도, 사랑을 하지도 말아야 한다. 

 



밀란 쿤데라(1929 ~ ). 그는 생존하는 최고의 소설가들 중의 한 명이다. 동시에 노벨 문학상을 진작 받았어야 할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정체성 - 6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