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드가, 춤, 데생>, 폴 발레리

지하련 1998. 8. 6. 20:42


<<드가, 춤, 데생>>, 폴 발레리(지음), 김현(옮김), 열화당



1.
"나는 그림보다 더 지성적인 예술을 알지 못한다."
- 90쪽

이 한 문장으로 발레리-그의 '드가'와 함께-는 '고전주의'를 그의 독자들에게 알린다. 그래서 자신의 지성을 연마한 이들에게만 (발레리의) 드가는 보이게 될 것이다. 이 '참혹스러운' 진실은 '현대 예술가들이 왜 자신의 지성을 버리고 감각에 의존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지름길이다.

"우리들의 사고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형태를 취할 때, 생명의 참된 본성을, 진화 운동의 깊은 의미를 표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 이것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부분은 전체와 비등하다든가, 결과는 원인을 자기 속에 그대로 흡수할 수 있다든가, 해변에 버려진 자갈은 그것을 밀어올린 파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든가 하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실은, 우리들의 사고 범주 속에 일(一), 다(多), 기계적 인과, 지적 합목적성 등 어느 하나도 생명이란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들도 곰곰히 느끼고 있다."
-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서문에서.

베르그송의 이 문장들은 인상주의 미술이 인간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자신의 지성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알 필요가 있는 법이다. 발레리가 낭만주의를 이해하면서도 고전주의적 이상을 피력하는 이유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2.
플라톤이었던가. 우리들의 이 언어, 바로 지금 그대가 읽고 있는 이 글자마저도 (실재의) 그림자임으로 우리들이 말하고 싶었던 그 무언가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플라톤에게 있어서 의도는 '이데아'를 향해 있지만, 여기에서 현대가 마주하고 있는 '기표와 기의의 문제'까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소쉬르가 이 '기표와 기의의 임의성'을 분명한 어조로 정의 내렸을 때,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언어의 불신'은 그저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언어는?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그렇다고 철학적 엄밀함의 언어도 아닌, 모호하고 때때로 이해하기 힘든 그 언어는? 현대의 심미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3.
화가에 대해 가장 진실한 어조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는 시인일 것이다. 보들레르가 들라크루아를 이야기하듯이 발레리는 드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연적인 포착'에 불과한 것이다.

"묘사란 일반적으로, 위치를 바꿔 놓아도 좋은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방을 그 순서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련의 문장으로 묘사할 수 있다. 시선은 원하는 대로 방황한다. 이런 방황보다 더 자연스럽고 더 진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진실은 우연이기 때문이다."
- 116쪽


4.
"바로 그거군! 전화란! 종이 울리면 자네가 가는군."라는 말로 발레리의 드가는 우리들의 눈에 뚜렷한 자국을 남긴다.

"드가는 언제나 혼자 있다고 느꼈고, 모든 형태의 고독 속에서 혼자 있었다. 성격 때문에 혼자였고, 특출난 그리고 특이한 본성 때문에 혼자였고, 성실성 때문에 혼자였고, 오만한 엄격성 때문에, 굽히지 않는 원칙과 판단 때문에 혼자였고, 자기 예술,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그가 요구한 것 때문에 혼자였다."
- 136쪽


5.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누군가의 몸짓이나 손짓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정신을 대신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발레리의 '드가'는 드가 자신이면서 동시에 발레리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진짜 모습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타인들 틈 속에 있는 것처럼 발레리도 드가도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라캉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드가가 무희를 그리면서 무희보다도 바닥을 더 넓게 그리는 이유와 같다. 바로크가 우리를 사로잡았던 '빛 나는 중심'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풍경화로 변한다. 푸생과 클로드, 콘스터블과 터너에 이어 우리는 이 흐름을 드가에서 만난다. 풍경화가 끝내 '기하학주의'로 가 닿는 것은 원근법주의에서 시작한 근대 회화가 반원근법주의로 가는 필연적 귀결인 셈이다.

원근법주의에는 그 속에 시선의 중심인 인간(이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회화에서의 '풍경'도 실은 풍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장식적이며 연극적인 자유를 가지고, 나무, 작은 숲, 시내, 산, 교회 건물을 이용한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몸을 맞댄다. 그들은 점점 아틀리에서 일하지 않는다. 차츰 들판에서 일한다. 그들은 사물의 견실함 혹은 유동성과 싸운다. 어떤 사람들은 빛을 공격하고, 시간을, 순간을 잡으려 한다. 이미 끝난 형태를 그것을 덮는 반사광, 섬세하게 조합된 스펙트럼의 요소들로 대치시키려 한다. 어떤 자들은 반대로 그들이 보는 것을 아무렇게나 만든다. 이렇게 해서 풍경에 대한 관심은 점차로 방향을 바꾼다. 행동에 의해 지배되는 행동의 종속물로서, 풍경은 멋있는 것이 있는 장소, 몽상의 거주지, 방심한 눈의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는 인상(印象)이 승리한다. 질료와 빛이 지배한다.'(112쪽에서 113쪽)


6.
'진실은 우연임으로' 몇 천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헤라클레이토스는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겨우 우리는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이 강물은 이 순간, 이 찰라를 지나고 나면 영원히 다시 담그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발레리는 헤라클레이토스 대신 제논을 택한다. 이 놀라운 역설이야말로 내가 발레리를 찬미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이다. 제논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나는 화살은 정지해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화살이 아니라 '화살을 분석하는 인간'을 말하기 위해서 였다. 화살을 실제로 날고 있지만, 그것을 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고 날지 않고 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가, 춤, 데생』이라는 제목의 비밀은 여기에 숨어있다.

드가의 말: "데생은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형태를 보는 방법이다."

이 문장에서 '보는'이라는 동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지성은 아닌 '감각'이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가 강물을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제논은 그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인간을 이야기하고 싶어함을 눈치채어야만 한다. 현대의 반인간주의는 보다 진실한 형태의 인간주의이다. 풍경 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그 뚜렷함을 상실하고 풍경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은 다윈의 말대로 우리가 원숭이들의 후예임을 인정하는 과정일 뿐이다. 발레리의, 그리고 현대의 고전주의는 이 이후의 일이다. 우리의 지성이 무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진실로 위대한 예술가들은 밀려닥치는 거친 물결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유일한 것을 찾는 '데카르트적 모험'을 새롭게 진행시킨 것이다.





드가.춤.데생 - 10점
폴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