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문화예술, 2007년 봄호

지하련 2007. 4. 28. 09:13


문화예술, 2007년 봄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문화예술’ 2007년 봄호를 다 읽었다. 어제 출근길에서 차례대로 읽기 시작해 오늘 아침에 다 읽었다.

하이라이트는 1954년 대학신문에 실린 황산덕의 글이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비판하는 글로써, 가상으로서의 소설과 현실로서의 사회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짤막한 인용문을 읽으면서 크게 웃었다.

어찌된 일인지 요사이 대학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정비석 선생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매일 들려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교수가 불우한 족속들 중 하나라는 것을 정 선생도 모르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정 선생에 앞서 화제가 된 김모씨는 <<나는 너를 싫어한다>>라는 작품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 작품의 대상자는 당당한 고관이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가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 고관에 대한 국민의 반감에 공명하는 바가 되어 이를 테면 성공적으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정비석 선생이 망신을 주고 있는 저희 대학교수들은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불쌍한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정 선생의 작품은 대학교수를 양공주 앞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 부인을 대학생의 희생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 선생이 논쟁이 되는 작품을 써서 김모씨와 같은 센세이션을 다시 한번 일으켜서 유명해지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우한 처지에 있으니 기운을 내라고 격려는 못 해줄 망정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써 가면서 대학교수를 모욕하는 것입니까. 수억 인의 원성을 개의치 않고서 자기 고집을 부리던 스탈린의 흉내를 내면서 수백 명의 대학교수와 수천 명의 그 가족과 수만 명의 대학생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 전체의 비난쯤은 문제도 아니라는 배짱입니까. 배짱도 좋고 예술도 좋으나, 선생의 대작 <<홍길동전>>을 읽는 수십만 중학생을 생각해서라도 대학교수를 사회적으로 모욕하는 무의미한 소설만은 쓰지 말아 주시길 희망합니다.
- 황산덕, ‘자유부인 작가에게 드리는 말’, 대학신문, 54. 3. 1

(* 이 때 황산덕 교수는 서울대 법대에 재직하고 있었으며, 이후 법무부 장관,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89년 타계하였다. 웹 인물 검색으로 자세한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훗날 황산덕 교수는 ‘자유부인’보다 더 심각해진 세태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까뮈의 ‘이방인’을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윤리’ 교재로 이용한다며, 씁쓰리해 하던 로브-그리예의 말이 떠오른다. 아마 황산덕 교수는 극단적으로 시니컬해지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추측해본다.

황유진의 '모자이크 혹은 데코파주'는 재미있는 글이다. 그가 쓴 글이 아니라 조합해 만든 글이지만, 그 시대를 적절히 반영하면서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 다음 나의 시선을 끈 글은 윤지관 교수의 언급이었다.  

결과는 스스로도 놀라웠습니다. 충실성과 가독성을 상당히 많이 살려 원작을 대체해 읽을 만한 번역서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전체의 10% 밖에 안 됐습니다. 셰익스피어 등은 전문가가 해서 나았지만, <<테스>>나 <<허클베리핀>> 등 널리 읽히는 소설작품만 따졌을 때 전체 6% 정도만 제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추천하기 힘든 결과가 나왔습니다. 종별로 제대로 된 것이 한 권씩이나마 있으면 했는데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유명 소설의 경우 한 편 정도 있는 게 전체의 3분의 2 정도, 3분의 1은 한 편도 없었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든가 <<무기여 잘 있거라>>같은 작품은 30여 종으로 번역돼 나왔지만, 우리가 평가하기로는 그 중 한 편도 추천할 것이 없을 정도로 번역의 질이 낮았습니다. 현재 우리 전체 번역문화나 풍토나 현실이 겉으로는 굉장히 풍성해 보입니다만 내용을 알고 보면 풍요 속의 빈곤이었던 거죠.
- 윤지관, ‘번역의 문화, 문화의 번역’ 대담 중에서.


'번역의 문화, 문화의 번역'이라는 대담은 그냥 교수 3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는데에 의미를 둘 뿐, 그냥 현상을 진단에 그치고 만 아쉬움이 남는다. 문제만 나열해 놓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에 대해선 그 어떤 언급도 없다.

그런 면에서 풍석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를 번역하는 이들에 대한 소개 글인 김문태의 '시대와.텍스트를.넘어,지향점을.찾는다'는 우리 번역 현실에서 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가 아닐까 싶다.  

번역사업이 이 정도까지 진행될 수 있는 세 축은 육억 원을 쾌척하신 송오현 영어전문학원 원장님과 출판을 약속해주신 김경희 지식산업사 사장님, 그리고 이 팀을 이끌고 있는 저를 포함한 번역연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 축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 문화의 저력이 표면에 드러난 것이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전 <<임원경제지>> 번역을 추진할 때, 여러 가지를 재지 않고 다만 우리 사회에 미칠 긍정적인 측면만을 생각했습니다. 젊음이 있기에 모험을 즐기고, 끊임없이 도전하려 합니다. 저희는 여러 방면의 전공자들이 펼치는 지식의 교류로서만 가능한 번역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 했습니다. 이 번역서가 고전 번역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길 바랍니다.
- 정명현(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수료)


백원담 교수의 글은 참 오랜만에 읽는다. 대학 시절 기억남는 선생 중의 한 분이셨다. 이 글을 읽으니, 다소 위축되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한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자본주의 산물인 '문화산업'이 앞서나가는 모습 앞에서 순수문학, 또는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세상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차갑지 못한 분이다.

최열의 글은 좋다. 추사 김정희와 오윤을 비교하며 쓴 글은 그의 해박함과 미술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책을 구입도서목록에 올려놓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