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불멸>과 관련된 짧은 노트

지하련 2002. 12. 17. 11:32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라는 작품을 읽고 있다. 이 유쾌하지만 슬픈 이 독서 중에 떠오른 몇 개를 노트해본다. 노트란 내 기억력의 또다른 방식이다. 


  1. '투쟁'의 마지막 부분, 소설의 묘사가 연극 무대의 묘사로 바뀌는 부분이 있다. 독자는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 연극 무대 바깥에 있는 관객으로 변한다.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의 의지에 의해. 이러한 방식은 독자에게 소설에 너무 빠지지 말고 소설 속 풍경을 보다 객관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소설가의 의도이다. 그만큼 독자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가가 의도적으로 객관화를 시켜줘야만 객관화를 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다. 


  2. '소외'란, 독일어로는 Entfremdung, 영어로는 Alienation, 불어로는 Alie'nation으로 표기한다. 이 개념은 헤겔,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를 통해 보다 정교하게 변한다. 이르는 인간이 그 자신을 위해 산출해낸 어떤 것, 자신의 의지나 몸짓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밖으로 대상화된 것이 도리어 원래 주인이었던 것을 타자화시키고 대상화된 그것이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소외적 타자'가 된다. 


  3. 실존Existentia는 소외Entfremdung보다는 조금 더 불유쾌한 단어로서 주체의 상실과 그것의 자각, 이 자각을 바탕으로 한 회복의 운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4. 브레이트의 '소격효과'는 관객이 스스로 관객임을 깨닫게 해주는 장치이다. 이도 쿤데라나 여러 현대 소설가들이 독자에게 끊임없이 '넌 독자야'라고 깨닫게 해주는 여러 가지 표현 양식들과 유사한 것이다. 


  5. 철학에서의 '소외'와 예술양식에서의 '소외'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거칠게 말해 인간 주체의 상실, 인간 존재근거의 위태로움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는 양식 상의 소외로서 감정이입의 전통을 중요시하던 예술 양식이 그 전통을 부정하면서 관객이나 독자에게 그 존재 근거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이 '소외'는 실존의 운동 끄트머리에서 볼 수 있는 자기 회복의 계기와 유사하다.  


  6. 앤디 워홀는 그 작품들을 통해 매우 독창적인 소외를 보여준다. 즉 일상 용품을 원래의 자리에서 전시장으로 자리 이동을 시키는 것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는 통조림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물건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니힐리즘적인 방식으로 전방위적으로 소외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극단화시킨다면, 우리 인간을 공장에 일렬로 세워놓는다면 공장의 부속품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분명 그 역도 가능하다. 인간주체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겨놓는다면 말이다. 그 공간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