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궁지, 위스망스

지하련 2007. 6. 3. 19:34


궁지
위스망스 단편선, 손경애 옮김, 문학과 지성사


현대의 압도적인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반-자본주의 예술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성토하며, 안정적 삶을 희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던 19세기에 반-자본주의 사상과 예술 활동이 성행했던 것일까? 그리고 현재와 19세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조리스 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의 세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들을 품었다.

자연주의 양식에 속하는 위스망스의 세 단편, ‘등짐’, ‘부그랑 씨의 퇴직’, ‘궁지’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끝내 몰락하고 마는 개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등짐’의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 곳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한 개인을 등장시키고(반-국가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부그랑 씨의 퇴직’에서는 직장 생활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 중년 신사의 강박적 경향을, ‘궁지’에서는 19세기 부르주아지의 돈에 대한 탐욕스럽고 부도덕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등짐’을 제외한 두 단편 - ‘부그랑 씨의 퇴직’과 ‘궁지’ - 는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이라는 점에서 위스망스가 보았던 과거 어떤 세계의 문제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더구나 19세기만 하더라도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그러한 창작활동에 매진해야 할 예술가들마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다는 안타까움을 들게 만든다.

현대 독자가 빠져들 만큼의 소설적 재미는 없지만, 19세기 후반의 소설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알기에는 매우 유용한 소설이 될 수 있다.

부연 설명

1. 안타까움에 대하여 - 현대 소설의 양식과 19세기 자연주의 소설 양식과의 차이로 인해, 눈에 보일 정도의 선명한 주제의식과 공격을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이 가지고 있다면, 현대 소설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성과 알레고리, 상징들로 그 공격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의 자아는 그 고통의 실체를 정면 응시를 하기 보다는 비켜보려고 하거나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봄으로써 그 고통을 방기하는 전략을 택한다. 현대 소설들이 가지는 반역사성은 이러한 도피적 성향의 반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안타까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2. 19세기 자연주의에 대하여 -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은 19세기 자연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실험실에서 가상의 실험 조건을 만들고 어떤 인과 관계를 생성시키는 것처럼, 자연주의 소설 또한 등장인물과 소설 속 환경 속의 어떤 인과 관계를 도출시키고자 한다. ‘궁지’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확실히 소설적 재미는 없으나, 어떤 시대, 어떤 체제에 대한 공격 방식으로는 매우 탁월한 양식이다.



궁지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