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쿠르베

지하련 2007. 7. 29. 11:10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쿠르베



"어떤 세기의 화가가 그 이전 세기나 미래의 세기의 사물을 재현한다는 것, 즉 달리 말해서 과거나 미래를 그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역사적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대적인 것이다. ... 또한 나는 회화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며, '현실적이고 실재하는' 사물들의 재현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화란, 어떠한 단어 대신에 모든 가시적인 대상으로서 구성된, 전적으로 물질적인 언어이다. '추상적인' 대상,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실재하지 않는 대상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 쿠르베,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1861년 12월) 중에서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오랜만에 미술에 대해서 잠시 끄적여 본다. 로만티시즘(낭만주의)의 로만은 로마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로망스(romans)'에 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족 부인과 기사의 사랑 따위나 요정과 마녀 같은 것들은 이 로만티시즘 시대(19세기 초반)에 부흥한 것도 이와 연관이 깊다. 요정과 마녀가 중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유는 이 서양의 전설은 기독교적이거나 그리스-로마적인 전통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게르만적-북유럽적이며 중세적 전통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역사 속으로 북유럽 게르만이 자신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중세가 시작될 무렵이며 7-8세기 이후에는 그들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르네상스)로 인해 이것이 다소 위축되다가 로만티시즘 시대에 와서 다시 불꽃을 피우게 된다. 북유럽 신화와 전통에 기대어 있는 '반지의 제왕' 같은 소설도 이러한 로만티시즘의 끝자락에 위치한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것들이 유행의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말한다.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두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지성인들이 서구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서구 역사 상 최초다. 18세기가 인문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지식인이 정치적 권력을 얻었으며, 이는 종교나 왕권, 혹은 군대에 기대어 이룬 것이 아니라 대중과 저널리즘(* 인쇄술이 얼마나 지대한 공로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에 기댄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과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은 '이성'일지 모르나, 그 귀결은 '광기'요, '파시즘'이었다. 결국 유럽은 '합리적 이성'이 현실 정치 상황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끝없는 절망감 속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낭만주의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흔히 '낭만적'이라고 할 때의 그 기분이 현실 앞에서 서서 현실에 대응하며 그것과 싸우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곳에 위치한 것도 바로 이 까닭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은 그 절망, 무력감, 광기와 싸우며 그것들을 보여준다. 들라크루와는 싸우는 낭만주의자였으며, 제리코는 보여주는 낭만주의자였다. 이러한 낭만주의자들 속에서 쿠르베는 낭만주의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된다. 즉 신화적 현실 세계(들라크루와)도 아니며, 미쳐버린 현실 세계(제리코)도 아닌, 그냥 너무 평범해서 아무런 가치 판단도 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경향을 '레알리즘'이라고 이름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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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유채, 135*200cm
1866년, 프티-팔레 미술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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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어
캔버스에 유채, 55*89cm
1872년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쿠르베의 '잠'은 사교계나 귀족 고객들의 취향을 고려해 그린 작품이다. 그의 표현력은 당대 최고였기 때문에,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예술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래 작품 '송어'를 보라. 뭐라고 하기에 다소 난감한 소재의 작품이다.
(미술고교에 다니는 학생이 이런 작품을 그린다면 바로 미술담당 교사에게 핀잔을 듣거나 야단을 맞겠지. 나도 초등학교 때 이런 유형의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상식 이하의) 지적이었는데.)

'송어'를 보면 쿠르베가 얼마나 정치적인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적절히 당시 지식인들과 미술계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 방법을 곧잘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을 통해 낭만주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였으며, 아카데미 미술과 낭만주의 미술에 파묻혀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식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쿠르베는 낭만주의 시대를 끝내고 근대 예술의 최절정인 인상주의 시대를 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쿠르베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면, 마네는 그 현실을 사각의 캔버스에 옮기는 방법에 있어서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다시 한 번 위 쿠르베의 편지를 읽어보자. 그리고 아래 그림을 한 번 보자. 1890년에 그려진 이 그림. 많은 웹사이트와 미술 관련 책에 등장하는 이 그림. 그런데 정작 권위 있는 미술사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 뭐, 이야기 해 봤자, 비난 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 이 쯤에서 그치는 것이 좋을 것같다. 더구나 이 그림을 대단한 그림인 양, 이야기해대는 무수한 웹사이트의 글쓴이들과 미술 관련 서적에 이 그림을 가지고 뭐라고 해댄 저자들이 솔직히 두렵기도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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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레옹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1890년

위 작품이 제작되기 70년 전에 그려진 아래 그림을 보자. 아리 세페르와 장 레옹 제롬이 뭐가 틀리지? 놀랍게도 세상은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놀라운 일이. 예술이 시대의 반영이라는 소리 따위는 집어치워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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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세페르, 성 루이의 죽음, 1817년

아리 세페르(Ary Scheffer)에 대해 보들레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보들레르는 들라로쉬(Delaroche)를 생각나게 하는 '그토록 불행하고 그토록 슬프고 그토록 막연하며 그토록 더럽기 짝이 없는' 셰페르의 그림에 대해 조소한다.
- A. 리샤르, '미술 비평의 역사', p.113

아, 이 글에서 들라로쉬까지 이야기하진 말자. 다만 인상주의 미술가들과 제롬, 아리 세페르, 들라로쉬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동격에 놓고 설명하는 글이나 책이 있다면, 그 책은 형편없는 쓰레기임을 기억해두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