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여름 밤의 공포

지하련 2007. 8. 8. 00:09


창을 열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두텁고 축축한 서른다섯 사내의 불쾌한 냄새를 치우려고 해보지만, 바람이 밀려들어 오는 것도 잠깐, 뒤 따라 들어온 빗방울들은 먼지가 쌓인 책상 귀퉁이를 적시고, 체모가 뒹구는 방바닥을 적시고,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을 덮치고 내 발은, 내 손은 금세 젖어버린다.

나무로 된 케이스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갈라진 캔우드 리시버 앰프의 불륨을 조절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풍의 피아노 음악 소리 사이로 비가 지상의 여러 구조물과 만나 부서지고 흐르는 소리를 엿듣는다. 그 소리 속에 이 여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어떤 비결이라도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기대를 해 보지만, 삐친 애인의 숨소리 마냥, 그 비결을 눈치 채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주눅이 들 정도로 비 소리는 요란하기만 하다.

아찔아찔한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왜 이리 평온한 것일까. 꼭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마냥, 모든 걸 손놓고 여신 아테네의 손길을 기대하는 오딧세우스처럼. 어제 몇 년 만에 만난 후배가 ‘형, 글 잘 썼는데, ...’이라고. 그러게. 원래 나는 한 가지만 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너무 낙천적이고 터무니없이 희망적이니, 그래서 너무 절망적인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읽은 A. 리샤르의 <<미술비평의 역사>>에서 봤던 들라크르와의 <야곱과 천사의 싸움La Lutte de Jacob avec l'Ange>가 떠오른다. 그 작품을 두고 A. 리샤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를테면 생-쉴피스(Saint-Sulpice) 성당에 있는 <야곱과 천사>를 볼 때 우리는 성서 가운데 씨름하는 천사(그는 야곱의 넓적 다리의 신경에 손을 댔다. 그러자 곧 힘을 못 쓰게 되었다)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작품의 힘 있는 형태와 은색의 빛에 감탄하게 되며, 성서에 쓰여있는 기묘한 사건보다도 들라크르와의 위대성에 감탄하게 된다. 즉 예술은 그 자율성을 획득하고, 각 예술은 저마다 그 특수성을 획득한 것이다.
- A. 리샤르, <<미술 비평의 역사>>, 48쪽, 열화당

우리 삶의 자율성이 거대한 자본주의에 종속되면 종속될수록, 그 반대 항에 대한 열망도 커져나가는 걸까. 그렇지 않을까. 아니면 포기하게 되는 걸까. 다시 도전하는 걸까. 아니면 위대한 천재들의 모습만 동경하다가 늙어버릴까. 과연 어떻게 될까.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오늘도 미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과 마주 하기 싫어 고개 돌리기만 지속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들라크르와, <<야곱과 천사의 싸움>>, 1858-61, 715*485 cm, 캔버스에 유채, 생-쉴피스 성당,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