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며칠 동안

지하련 2003. 12. 26. 11:18

며칠 동안 미술사 책만 봤다. 4-5 년 전 공부 한참 할 때, 정리해놓았던 노트를 새로 꺼내어 보는데, 역시 예술사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그리스 예술을 정리했는데, 그리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개념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고전주의를 이해하려면 그것 뿐만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를 알아야하고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사 문학의 대표작들도 읽어봐야되고 기초적인 건축 지식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수히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어떤 양식을 보여주었는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후대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공부하다 보면 끝도 없다. 그러나 해야 한다. 그래야 예술작품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니깐 미술 관련 책만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미술에 대해서 정통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차라리 서양사나 문화사를 제대로 전공한 이의 설명이 훨씬 나은 경우가 많다.

보통 그리스 고전주의를 이야기할 때 '전형', '카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조각상이 8등신이 되어야한다는 엉터리 소리를 하곤 한다. 실제 이 개념은 후대에 나오고 그리스 고전주의 작품들 중에 정확한 8등신은 없다. 비트리비우스가 그리스 고전주의 전성기 몇 세기 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나라의 어떤 책들을 보면 카논에 대해서 길게 적은 책들도 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는 아예 예술에 있어서 전형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전형적'인 작품은 중요하지만 '전형'에 딱 부합해버리는 순간, 우습게도 그 예술작품은 작품의 생동성을 잃고 보는 이를 사로잡지도 못한다. 즉 고전주의 작품들 중에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작품들은 '전형'을 약간씩 벗어나 자리를 잡는다. 그러니깐, '이건 전형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이건 전형적이야'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술사를 좀 어지러운 학문으로 이해하는 폐단이 생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자끄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그러한 예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을 신고전주의의 걸작으로 여러 저서에 실려있으나, 실제로 이 작품을 지탱하는 힘은 낭만적 정신이다. 자끄 루이 다비드의 다른 작품들과 이 작품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느 작품에 깊은 어둠을 그려넣었는가. 장 폴 마라의 얼굴에는 고전주의적 신념에 보이는 듯 하나, 그것은 죽음으로 사라져버린 것. 그리고 이제 어둠이 밀어닥치기 시작한다. 눈을 감은 마라 위로 어둠이 내려앉는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흘러갔다. 여하튼 며칠 정신없이 책만 보다 오늘 잠시 꽤 많이 빈둥거렸는데, 더 정신이 없어진 듯 몽롱하다.

이제 베트벤 마지막 교향곡만 들으면 된다. 다 들었다. 역시 교향곡이다. 교향곡을 듣기 위해 준비한 게 한 이 년 정도는 된 것같다. 처음 들으면 감당하기 힘든 게 교향곡인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