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광합성, 사이토우 마리코

지하련 2011. 9. 7. 15:22



사이토우 마리코의 <입국>이라는 시집에 있는 시다. 민음사에서 나왔는데, 지금도 구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집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 텐데, 이 시집 보지 못한 지, 몇 해는 족히 된 듯 싶다. 한 번쯤 만나, 이야기 해 보고 싶은 그런 시인이었는데, 지금은 일본에서 뭘 하고 있는지. (2004. 12. 1)

1993년에 이 시집이 나왔으니, 이제 2년만 더 있으면 20년이 되는 셈이다. 그 사이 세상 많이 변한 것같지도 않은데 ... 때때로 기억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추억은 가슴은 아프게 한다. 과거는 현재의 짐이 되고 미래를 오지 않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시 현재는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된다. 우리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는 것이라 믿지만, 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 태양 아래 초록 식물은 광합성을 하고, 이 지구의 생명들은 영원한 신비를 가진 에너지로 시간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것이다. (2011. 9. 7)




                           光合成



            한국에 오기 전에 나는 모든 책을 다 팔아버렸
          다.  헌책방 할아버지가 내 방에 와 내가 십 년
          동안 간직하며 이사할 때마다 질질 끌어온 글자
          의 떼를 모조리 데리고 가셨다.  잘 가요, 내 책
          들아. 그것은 무척 무거웠다. <책이란 참 무겁군
          요>  내가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
          요. 아무래도 원래는 나무였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책 한 권 안 가지고 여기에 왔다.


            일본말로  나무는  KI라고 하며  한국말로는
          NAMU라고 한다. 십 년 전에  처음 한국말을 배
          웠을 때 <나무>란 낱말이 나의 가슴속으로 뿌리
          를 박았었다.  한국에 온 지 두 달 동안 줄곧 아
          래만 보면서 돌아다녔는데 유월이 되고 처음으로
          눈을 들어 봤더니  그들이 잎사귀를 살랑거리며
          서 있었다.  그들을 <나무> 하고 부르면 내 속에
          서 <나무>가 답례했다.  십 년 공들여 간신히 푸
          르게 자란 잎사귀들이 눈부시게 펄럭이면서.


            <한국에 유학 가기로 했어요.  이 년이나 지나
          야 돌아올 거예요> 내가 그렇게 했더니 할아버지
          는 책에 쌓인 먼지를 닦으면서 말했다. <그 무렵
          에 나는 살아 있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꾸린 책
          을 헌 트럭에 싣고 나갔다. <잘 가시오, 열심히
          공부하세요> 하면서. 그가 평생 동안 얼마나 책
          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할
          아버지가 전에도 책을 사러 내 방에 왔을 때 한
          사회심리학 책을 들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
          다. <이 책은요 삼 년 전만 해도 잘 팔렸는데 요
          즘은 통 안 나가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안 팔기
          로 할게요. 사실은 저도 아직 안 읽어봤거든요>
          <그게 좋을 거예요. 한번 읽어보시면 아주 좋을
          거예요>
            그래도 끝내 그 책은 읽지 않은 채 나는 떠나
          게 됐지만.


            여기 와서 나는 또 많은 책을 샀다. 나무 밑에
          서 책을 읽으면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볕 모양
          대로 생각이 흩어져 간다. 한 권의 책은 많은 나
          뭇잎들의 역사로 가득 차 있다.  말을 잃어버릴
          때야  침묵은 어느 나라 말도  아니며 어느 나라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한 券의 말이 한 그루 나무의 삶과 어울릴 줄
          안다면 어느 나라 말이라도 좋다.
            말이 한 그루 나무의 내력을 지켜줄 줄 알고
          그 나무를 키웠던 지하수 한 방울 한 방울까지도
          엎지르지 않고 괴롭히지 않고 삼켜낼 줄 안다면.


            다른 나무들이 다 벌거벗게 된 다음에도 푸른
          잎사귀를 살랑거리며  서 있는 가로수 한 그루.
          그것은 끝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눈과 같다.
          또는 눈뜬 사람들 속에서 홀로 瞑目하는 사람 같
          다.  나무들이 가장 싱싱하게 살아 있어 보이던
          그 유월에는 다른 어느 나무와도 다름이 없게 보
          였던 그 나무.  그리고 다음 날 내가 본 것은 그
          나뭇잎사귀  사이사이에 모여 앉아 지저귀고 있
          는 참새들.  설레는 가슴처럼 들끓으며 서 있는
          가로수 단 한 그루. 마치 말이 되기도 전에 사상
          을 달래는 꿈과 같이.




입국
작가 : 사이토우 마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