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몰락을 향해가는 타인들

지하련 2008. 11. 25. 09:35

집중해서 뭔가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집중은 되지 않고 마음만 어수선하다. 어제 아침 기사를 보니, "당신없인 살 자신없다"며 기러기 아빠인 중년 남성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혼자 아이와 아내를 그리워했던 아빠는,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까지도 이젠 멀어졌다고 생각한 아내와의 이혼을 거부하다가 끝내 이혼하고 자살을 택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한국에서 오래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어느 미국인은, 한국에 살면서 '행복하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살았던 수 십 년 간 한국은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부, 그리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도리어 더 불행해졌다고 여긴다는 것을 낯설고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안타까워했다.

우습게도(매우 낯설게도) 우리의 가치 기준은 자기 자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나온다. '엄마 친구 아들'이나 '엄마 친구 딸'가 단적인 표현이다. 자기 스스로 세워놓은 어떤 기준이나 목표가 아니라, 그런 기준을 지키거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늘 남과 비교하는 어떤 자리에서, 남과 비교될 수 있는 기준이나 목표를 만들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자극하고 학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실패나 몰락이 자기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 이 사회, 그리고 타인들에게서 기인한 것이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최근 늘어나고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범죄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아주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하나가 유행하면, 그 유행이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가듯이,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유롭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리고 그러한 비교를 통해 만들어지는 우리의 일상이 무시당하거나 잘못될 땐, 그 잘못의 방향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향햐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현재 정부나 여당의 '잃어버린 10년'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비난의 화살을 자신의 책임이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그 실패를 경험 삼아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고가 거의 없다(도리어 이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공무원의 복지부동도 여기에서 나오고 기업 경영에서 '혁신'이라는 단어가 최근에 들어서야 좀 제대로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하긴 진짜 혁신인 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남이 잘 되면, 나도 해야 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조선업의 호황으로 (먼 미래에 대한 예측 없이) 너도나도 조선업에 뛰어든 관계로, 한국의 조선업은 구조조정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건설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남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남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열을 올린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타인에게는 남이 아닌가. 꼭 불행의 뫼비우스띠처럼 그렇게 연결되어 우리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수능이 끝난 학생들이 자유롭게 논술학원에 갈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에 놀라웠으며, 냉철한 현실 인식이 도리어 낯설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공교육과 사교육은 공생 관계인가. 하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여당과 야당이 공생관계이듯, 공교육과 사교육도 공생관계일 것이다. 우리 자신이 타인과 공생관계이듯이.

그런데 누군가들은 이 공생 관계를 끊어 자기 스스로의 기준과 목표를 만들어 미래를 개척해야만 한다. 타인과는 전혀 관련없이 말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바람직한 공생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가족이 될 것인데, 이젠 그 가족마저도 해체되고 있다. 실은 우리 모두가 공범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