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 1048

눈 내린 도서관에서의 빡침 - 공적 공간의 사적 점유

책들이 고요하게 숨을 쉬는 서가 사이로, 눈 내리는 창 밖 풍경을 보러 집 근처 도서관에 왔지만, 아, 나는 스트레스로 터질 것만 같다. 내 옆에 앉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는 참고서를 잠시 보다가, 다시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참고서를 잠시 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고, 그리고 이 행동을 무려 한 시간 이상 반복을 하다가 나갔다. 심지어 커피를 가지고 간 사이 내 책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책가방을 올려놓는 대범함까지 보여주었다. 그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집어던질 뻔했다. 그 화를 참는데 약 삼십분 정도 걸렸다. 앞 좌석에 앉은 한 여성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앉더니,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책상 위에는 아무..

동네 구멍가게의 폐업

마지막 남은 동네 구멍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제 내가 사는 곳 반경 1km 이내에 구멍가게는, 없다. 대형 수퍼마켓과 편의점들만 남았다. 하나 둘 있던 식당들도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간판을 바꾸고 있다. 각자의 개성은 사라지고 평준화되며 비슷비슷하게 변해간다. 익숙해지고 평범해지면서 활력을 잃어간다. 풍경의 변화가 익숙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곳엔 이젠 나무 한 그루만 남아있다. 뒷산은 그대로이지만, 산으로 들어가는 길들은 모두 변했다. 어렸을 때 집들이, 마을이 사라지는 풍경을 보았다. 논, 밭, 집들이 있던 곳은 텅빈 황토빛 대지로 변했다. 그렇게 변해가던 몇 년 동안 그 곳을 돌아다니며 수정을 모았다. 자수정 광산이 있는 창원은 땅을 파헤치면 어렵지 않..

23년 늦가을 어느 날

작은 가방을 앞으로 돌려맨 그녀는 9호선 급행 열차의 문이 열리자 곧바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누구보다 빨리 돌진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 비장한 돌진이었다. 새치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일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삶은 돌진이 아니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종종 자신의 일상을, 인생을, 세계를 규정짓는다. 열차 안 가득 빼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그녀 위로 다른 사람들이 다시 쌓이고 출입문이 닫히고 다음 역을 떠난 전동 열차를 보면서 다양한 대안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작은 행동들이 쌓여 결국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자주 잊어버린다. 이러니 세상 탓을 해야할 것도, 자기를 탓하게 된다. 뒤늦은 반성과 후회로 자신을 보니, 모든 게 자기 탓이..

에라주리즈 맥스 리제르바 까베르네 쇼비뇽

예전엔 사오만원 대에 있던 와인인데, 가격이 많이 떨어져 삼만원대에 구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수입되었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와인이다. 도리어 Max Reserva가 아니라 바로 아래 가격대에 있는 에라주리즈Errazuriz 와인을 보기 더 힘들어졌다. 만 원대에서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 에라주리즈, 얄리, 우드브릿지, 디아블로 등이 있었는데, 에라주리즈나 얄리는 쉽게 보기 어려워졌고 디아블로만 엄청 구하기 쉬워졌다. 우드브릿지도 보기 힘들어졌다. 에라주리즈 맥스 리제르바에서는 '쉬라'의 명성이 한때 대단했다. 가성비가 최고라는 평판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칠레에서 유명한 와인너리인 에라주리즈. 이 곳에서 나오는 와인들 대부분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적당한 가격대의 에라주리즈 ..

70년대 후반 일본

얼마전 읽은 어느 기사에서 요즘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1970년대 후반, 80년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 대한 질투와 원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 아마 자신들의 부모 세대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 지금도 위 이미지과도 같은 느낌을 일본에게 받곤 하는 나에겐,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일본과 실제 살아가는 이들이 느끼는 일본은 다르구나 생각했다. 저 이미지가 내 시선에 잡힌 이유는 단순한다. 마치 신기루같다고 할까. 상당히 작위적인 풍의 사진이라서 연출된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나는 그것이 거품 시대 일본이 가진 이미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일본은 역사를 잊고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려고 노력했던 건 아닐까 하고. 그런데 위 사진의 출처를 검색하다가 더 기묘한 상황에 놓였다...

벤로막Benromach 10년

벤로막 10년 Benromach 10y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speyside) 벤로막 증류소 예전만큼 술을 마시지 못하고 술을 마시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시는 탓에 최근 많이 줄인 상태이지만, 좋은 술 앞에선 흔들린다. 한동안 와인을 집중적으로 마시다가 최근엔 전통 소주와 위스키로 넘어갔다. 블랜디드 위스키나 버번 위스키보다 묵직한 피트에 빠져, 최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는 '아드벡'으로 바뀐 상태다. 이 위스키에 대해선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얼마 전에 마신 벤로막 10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익히 가성비 갑이라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 정도로 훌륭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목넘김, 상당한 밸런스, 풍부한 과실향과 스모키함 등 적절한 균형미를 가지고 있었다. 싱글 몰트 입문용..

가을 감기와 르네 샤르

르네 샤르(Rene Char, 1907 - 1988). 번역서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가 읽었던 많은 프랑스 문인들이 한결같이 애정을 표시했던 시인은 르네 샤르였다. 시에 대한 번역은 반역일 지 모르나, 여러 개의 번역들 중 하나의 번역일테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기에 걸렸다. 아이가 먼저 A형 독감에 걸리고, 내가 이어 걸렸다. 하루는 전철을 타고 나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 이후 몇 주가 지났으나, 목은 계속 아픈 느낌이다. 한 번 그렇게 아프고 나니, 체력 회복이 쉽지 않다. 휴식이 필요한데, 밀려드는 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연말까진 이 모드일 듯하여, 걱정이다. 먼저 커피부터 줄여야 하는데,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란 닥치지 않은 공포와 마주하는 듯하여, 쉽지 않..

에라스무스 분위기

1. 발터 쾰러Walther Kohler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에라스무스-분위기Erasmus-atmosphere"에서 더욱 자유롭게 숨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에라스무스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대신 군중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의 메시지 자체는 실용적 의미가 거의 없었으며, 그의 메시지가 낳은 것은 운동이 아니라 분위기, 한밤 중의 순간적 불빛같이 막연하고 요정의 약속 같이 막연한 분위기였다. 루터파는 있었지만 에라스뮈스파는 없었다.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 28쪽(문학동네) 2.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안다고, 바른 생각을 하는 것도, 옳은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서 정착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크라카우어의 생각처럼, 그저 어떤 막연한 분위기 속에 있을 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국 나이로 쉰 아홉인 데이브는 2014년 이스라엘 전투기의 가자 지구 공습으로 그의 형제들과 조카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3살된 딸과 고작 7개월 밖에 안 된 아들을 잃었다. 데이브의 가족은 이미 무수히 죽어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부일 뿐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기독교도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팔레스타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한다. 상당히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던 오케스트라로 유명했다고 회고하지만, 이스라엘이 생기기 전 팔레스타인과 그 이후의 팔레스타인은 다른 나라다. 팔레스타인에 이슬람교도만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쇼아 이후 많은 유태인들이 그들에게 닥친 비극을 노래하지만, 국제 정치의 결과물인 이스라엘(솔직히 19세기에 없었던 듣보잡 나라다..

09.21

09.19. 기록을 한다. 예전엔 종이 위에 펜으로 그리거나 썼는데, 이젠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리며 글을 쓴다. 격세지감이다. 아마 지금도 고향집 다락방엔 수십년 전, 짝사랑하던 여고생의 흔적이 남은 일기장이 먼지를 먹고 있겠지. 그 땐 참, 가슴이 너무 떨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지금도 그럴까. 그런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될꺼야. 정말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진지하게 생계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탓에, 어쩌면 무심하게도 무조건 작가가 되겠다고 여겼던 탓에, 직장 생활이 가끔, 자주, 예고 없이 어색하기만 했다. 자주 회사를, 직장을 그만 두었다. 일을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 탓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일을 잘하는 것 이상으로 책임감도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