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23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지음), 송은경(옮김), 민음사 '위대한 집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숙고해 보지 못한 어떤 총체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145쪽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왜 스티븐스의 집사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연신 재미있어하며 읽고 있었다. 실은 대부분 의미 없는 에피소드들이다. 스티븐스이 캔턴 양을 찾으러 가는 동안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스티븐스과 캔턴 양과의 관계로 집중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개에 익숙한 독자는 이 관계에 호기심을 가지며 읽지만, 켄턴 양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

책그림책, 크빈트 부흐홀츠

책그림책 BuchBilderBuch W.G.제발트, 밀란 쿤데라, 아모스 오즈, 미셸 투르니에, 세스 노터봄, 마르크 퍼티 등(지음), 크빈트 부흐홀츠Quint Buchholz(그림), 정희창(옮김), 민음사 크빈트 부흐홀츠(1957~, 독일)는 삽화가이다.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 그림들을 그려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만을 보면 참 좋은데, 이 책에서는 몇몇 글들은 참 좋지만 대부분의 글은 평이하다. 내 생각엔 번역 탓일 듯싶다. 모두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을 테니. 결국 두 세 번의 번역을 통해 한글로 옮겨왔을 테니, 최초의 글과 우리가 읽게 되는 글과의 거리는 상당할 것이다. 가령 오르한 파묵은 터키어로 글을 쓴 후 영어로 옮기거나 독일어로 옮겼을 것이고, 영어라면 다시..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지음), 윤진(옮김), 민음사 최근 새삼스럽게 뒤라스를 다시 읽으면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뒤라스를 찾아 읽는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뒤라스를 읽지 않았던 사이, 낯선 그녀의 책들이 번역되어져 있었고, 아직도 뒤라스를 이야기하고 있음에 감동했다. 사람을 만나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던 시절이 이제 언제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지만(그 때가 그립다.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사랑에 빠졌던). 올리비아 랭와 데버라 리비의 글에서 만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책에서의 뒤라스와 겹친다. 올리비아 랭에게 뒤라스는 (과격하게) 술을 좋아했던 예술가 뒤라스였다면, 데버라 리비에게서 뒤라스는 남다른 통찰을 보여준 여성 작가였다. 연기는 텍스트가 가진 것을 오히려 덜어 낼 뿐, 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지음), 원용호(옮김), 민음사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읽은 바 있지만,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즉물적이고 무미건조하며 딱딱하고 폐쇄적이었다. 실은 한트케의 소설이 가진 작품성이 바로 이러한 즉물성이 될 것이다. 골키퍼는 수동적이며 반사적이다. 골키퍼는 먼저 움직이기 어렵다. 날아오는 공에 대해 반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매사에 반사적으로 움직인다면, ... 주인공 블로흐는 이런 인물이다. 그는 대화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만, 교감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수렁에 밀어 넣는다. 딱히 이유도 없다. 이러한 고립감, 단절감, 폐쇄적으로 향해 가는 자신 주변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없다. 그냥 보..

밤엔 더 용감하지, 앤 섹스턴

밤엔 더 용감하지 Braver at night 앤 섹스턴Anne Sexton(지음), 정은귀(옮김), 민음사 앤 섹스턴 시집을 읽었다.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스스로 버티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미워하지만 사랑했고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기 내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1960년대 미국 여류 시인이 무엇과 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할까. 더블 이미지 Double Image (...) 너를 기쁨이라 부를 수 있도록 우리가 너를 조이스라 이름 지은 걸 나는 기억해 강보에 푹 싸인 채 축축하고 이상하게, 너는 내 무거운 가슴에 어색한 손님처럼 왔어. 나는 네가 필요했어. 나는 남자애를 원하지 않았어. 여자아이만을, 이미 사랑받고 있는, ..

정체성, 밀란 쿤데라

정체성 L'Identite'밀란 쿤데라(지음), 이재룡(옮김), 민음사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쿤데라 특유의 문장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간 읽었던 그의 소설들과 비교한다면 읽는 재미가 다소 떨어진다고 할까. 어쩌면 내가 그 사이 나이 든 탓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상당히 오래 전 일이니(찾아보니, 거의 십 년만이다). 꿈은 한 인생의 각기 다른 시절에 대한, 수용하지 못할 평등성과, 인간이 겪은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는 동시대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꿈은 현재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며 현재를 무시한다. (9쪽)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꿈을 꾼다. 샹탈도 꿈을 꾸고 장-마르크는 그 꿈을 위해 익명의 편지들을 그녀에게 보낸다. 그것으..

지적 자본론,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 자본론 마스다 무네아키(지음), 이정환(옮김), 민음사 처음 읽을 땐 꽤 시간이 걸렸다. 두 번째 읽을 때 금방 읽었다. 그러나 처음이나 두번째나 이 책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은 똑같았다. 도리어 늘 고객가치라는 단어를 듣고 읽지만, 정작 실무에선 그걸 잊어버린다는 걸,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깨달았다. 고객 가치를 우선하라. 세계 최초를 추구하는 일의 공허함 (12쪽) 우리는 고객 중심이라는 이야기를 떠들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하며 오랜 기간의 관찰과 설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도 정작 놓치는 것이 고객 가치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실현하기 어려운 게 고객 가치다. 어쩌면 고객 가치를 추구하는 많은 기업들은 고객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제..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장 볼락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Paul Celan / unter judaisierten Deutschen 장 볼락Jean Bollack(지음), 윤정민(옮김), 에디투스, 2017 로 잘 알려진 파울 첼란의 연구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흔아홉의 나이에 파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시인.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가 그 말을 번복하게 만든 작가. 하지만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 한국 시인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파울 첼란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 때, 이 책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는 쉽지 않다. 하지만 ..

강의 백일몽, 로르카 시집, 민음사

사진출처: https://www.concertgebouw.be/en/event/detail/1442/Federico_Garcia_Lorca 강의 백일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정현종(옮김), 민음사 이 번역 시집은 시인 정현종이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어떤 시들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지고, 옮겨진 그 언어에서 다시 또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사이에도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 해댱된다.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총살당한 이 스페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자면,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첫 사랑을 만난 듯 가슴 떨리고 흥분된다. 서정적인 강렬함이 지배하는 로르카의 시 세계는 후회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청춘의 아름다운 ..

푸른 곰팡이, 이문재

푸른 곰팡이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제, 중에서 이문재의 (민음사)가 있는데, 서가를 찾아보니 없다. 정리되지 않는 서가, 정리할 시간도 없는 서가, 이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마저 사라지고, 이 시도 읽었으나 이젠 기억나지 않아, 신문에서 읽은 다음, 출처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문재를 읽던 시간도 이젠 드물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