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64

봄의 정원, 시바사키 도모카

봄의 정원 시바사키 도모카(지음), 권영주(옮김), 은행나무 베란다와 창문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형태가 똑같은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2층 집은 벽에, 1층 집은 바닥에도, 볕이 드는 곳과 그늘의 경계가 보였다.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를 내는 것도 없었다. 해시계처럼 양달과 응달의 경계가 이동할 뿐이다. 도서관에서 그냥 집어들고 읽었다. '아쿠타카와 수상작'이라고 하나, 그냥 작은 소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시대 일본을 알 수 있을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관음증적이면서도 쓸쓸한 봄날의 풍경화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도 독자도 심지어 소설 속 인물들 마저도 풍경의 일부가 된다고나 할까. 결코 속마음을 들킬 필요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그 때 그 모습만을 묘사할 ..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The Weird and The Eerie 마크 피셔(지음), 안현주(옮김), 구픽 마크 피셔Mark Fisher의 대표작은 이다. 마크 피셔를 읽겠다면, 보다 이 낫겠다. 나 또한 아직 읽지 않았지만. 내가 마크 피셔를 알게 된 계기는, Slow Cancellation of the Future라는 표현(에 나온 문구라는... 이 책은 번역되지 않았고 아마존 위시리스트에만 올라가 있을 뿐이다)때문이었다. 어떤 맥락에서 이 표현이 나왔는지 잊어버렸지만, 적어도 21세기 초반 젊은 세대들이 마주한 어떤 분위기라고나 할까. 얼마 전 치러진 선거도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야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여당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반영된... 여튼 마크 피셔가 궁금하던 차에..

눈물들, 파스칼 키냐르

눈물들Les Larmes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지음), 송의경(옮김), 문학과지성사 키냐르, 때때로 생각나는 이름. 그러나 한동안 읽지 않았던 작가. 오랜만에 한 권을 읽었다. 아주 오래 전 을 읽은 후, 감동을 받은 후, 그의 소설 몇 권을 더 읽었는데,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어쩌면 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 10여 장으로 구성된 10권의 책이라는 좀 특이한 목차를 지닌 이 작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프랑스어가 태어나는 순간'의 현장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247쪽) 역자의 설명대로 이 책은 최초의 니타르Nithard에 대한 소설이다. 다시 말해, 니타르(라틴어로 니타르두스 Nithardus)는 842년 2월 12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를 2세와 동프랑크 왕..

잃어버린 낙원, 세스 노터봄

잃어버린 낙원 Lost Paradise 세스 노터봄Cees Nooteboom(지음), 유정화(옮김), 뮤진트리 어쩌면, 나는, 너는, 우리는, 늘, 언제나, 각자만의 천사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로 설정된 소설은 또 다른 '잃어버림'으로 끝을 맺는다. 알마의 상실감(상처)은 본원적인 것이어서, 애초에 무드Mood같은 것으로 인해 일상을 벗어나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는 일로 이 소설, 혹은 여행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 일은 너무 비정상적이어서 일종의 은유적인 형태의, 소설적 장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일 정도이며, 이 사건에 대한 서술이나 표현, 또한 직접적이지 않고 마치 꿈처럼 흐릿하게 서술되어 독자는 그 사건의 끔찍함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

특성없는 남자 2,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2 Der Mann ohne Eigenschaften 로베르트 무질(지음), 안병률(옮김), 북인더갭 1권을 2019년 봄에 읽었으니, 1년 반 정도를 건너뛰어 2권을 읽은 셈이다. 미완성인 소설의 초반부만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소설 읽기의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건은 없고 상당히 지루하게 대화와 사색만 이어진다. 대체로 위대한 문학이라고 알려진 작품들이 지루한 경우가 많다고 하나, 이 소설은 무수한 이들의 찬사와 대비되어 내가 더 심하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내 감상은 간단하다. 사건은 없고 오직 말과 사유만 있는 소설이다. 사람들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진다. 주인공인 울리히는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다. 뭔가 로맨스가 일어날 만한 장면들이 보여지기도 하나, ..

근대의 서사시, 프랑코 모레티

근대의 서사시 Modern Epic프랑코 모레티(지음), 조형준(옮김), 새물결 프랑코 모레티의 이 책, 읽기 쉽지 않다. 그의 말대로 너무 유명하지만, 거의 읽히지 않는(읽기 어려운) 서사 작품들을 두고, '서사시'라는 테마를 통해, 근대가 어떻게 이들 작품 - 세계적 텍스트 속에서 드러나는지, 말 그대로 어떤 특징들을 가지며, 어떤 방식으로 근대사회, 혹은 근대성을 담아내고 있는가를 상당히 방대한 인용과 참고 문헌들, 문학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언급하는 탓에 까다로운 독서를 요구한다. , , , , , , , . 이것들은 그저 오래된 책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역사적 기념물이다. 근대 서구가 자신의 비밀을 찾아 오랫동안 자세히 파고들어온 성스러운 텍스트이다. (18쪽) 하지만 모레티의 의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 스콧 피츠제럴드(지음), 박찬원(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두 번째로 읽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다. 는 그 명성에 비해 내 감상은 다소 실망스러웠고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을 잘 알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풍속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할 만하달까. 이 책은 단편집이다. 다들 익히 알다시피, 피츠제럴드는 생계를 위해 단편을 엄청 쓴 소설가였다. 하지만 탁월한 문학성을 가진 단편은 몇 편 되지 않고 그의 명성에 비해 단편집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다. 현대의 단편작가들, 가령 레이몬드 카버나 엘리스 먼로 등과 비교해서도 피츠제럴드의 단편들은 뛰어나지 않다. 아마 이 점은 피츠제럴드는 잡지에 실리는 단편이 가져야 하는 흥미로움에 집중된 상상력, 그리고 20세..

2010년대 최고의 소설 데뷔작 The 10 Best Debut Novels of the Decade

Literary Hub에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영어로 씌여진 소설들 중 최고의 데뷔작 Top 10, 를 골라 실었다. 찾아보니, 몇 권은 번역되었고 몇 권은 번역되지 않은 상태다. 내가 이 기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대체로 가장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소설은 작가가 맨 처음 쓴 데뷔작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자유롭고 도전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극대화시킨다고 할까. 번역서가 있는 경우에는 옆에 번역된 정보를 같이 표시하였다. 의외로 번역된 책이 많지 않다. 다섯 권 밖에 되지 않다니. 글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Friends, it's true: the end of the decade approaches. It's been a diffi..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Martha Craven Nussbaum, 1947 ~ ) 마사 누스바움의 책이 이렇게 많이 번역되었는지 몰랐다. 그만큼 많이 읽힌다는 뜻일텐데, 나는 그동안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를 도서관에서 빌려 조금 읽다가 대출 기간이 다 되어 반납한 것이 전부다. 오늘 서가를 정리하다가 프린트해놓은 논문 하나가 있어 블로그에 정리하여 올린다. 아래 논문을 통해 간단하게 마사 누스바움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스바움의 책 몇 권을 사서 읽어야겠다.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에 관한 수용적 검토, 윤철홍 교수(숭실대), 제 17권 제 2호, 한국법철학회, 2014년 (PDF 주소: http://kalp.kr/bbs/board.php?bo_table=sub4_2&wr_id=449&page=2) * ..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지음), 박찬원(옮김), 문학동네 잔인하기만 하다. 몇 명의 죽음 앞에서도 그 잔인성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 한 켠을 어둡게 물들이지만, 그 잔인한 마을의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은 더 없이 아름답기만 하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6월의 비'는.하늘이 열리고 물이 퍼붓듯 쏟아져내리면, 오래된 우물이 마지못해 되살아났고, 돼지 없는 돼지우리에 녹색 이끼가 끼었으며, 기억의 폭탄이 잔잔한 홍찻빛 마음에 폭격을 가하듯 홍찻빛 고요한 물웅덩이에 세찬 비가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풀들은 젖은 초록빛을 띠었고 기쁜 듯 보였다. 신이 난 지렁이들이 진창 속에서 자줏빛으로 노닐고 있었다. 초록 쐐기풀들이 흔들렸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