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 89

잃어버린 낙원, 세스 노터봄

잃어버린 낙원 Lost Paradise 세스 노터봄Cees Nooteboom(지음), 유정화(옮김), 뮤진트리 어쩌면, 나는, 너는, 우리는, 늘, 언제나, 각자만의 천사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로 설정된 소설은 또 다른 '잃어버림'으로 끝을 맺는다. 알마의 상실감(상처)은 본원적인 것이어서, 애초에 무드Mood같은 것으로 인해 일상을 벗어나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는 일로 이 소설, 혹은 여행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 일은 너무 비정상적이어서 일종의 은유적인 형태의, 소설적 장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일 정도이며, 이 사건에 대한 서술이나 표현, 또한 직접적이지 않고 마치 꿈처럼 흐릿하게 서술되어 독자는 그 사건의 끔찍함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

특성없는 남자 2,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2 Der Mann ohne Eigenschaften 로베르트 무질(지음), 안병률(옮김), 북인더갭 1권을 2019년 봄에 읽었으니, 1년 반 정도를 건너뛰어 2권을 읽은 셈이다. 미완성인 소설의 초반부만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소설 읽기의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건은 없고 상당히 지루하게 대화와 사색만 이어진다. 대체로 위대한 문학이라고 알려진 작품들이 지루한 경우가 많다고 하나, 이 소설은 무수한 이들의 찬사와 대비되어 내가 더 심하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내 감상은 간단하다. 사건은 없고 오직 말과 사유만 있는 소설이다. 사람들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진다. 주인공인 울리히는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다. 뭔가 로맨스가 일어날 만한 장면들이 보여지기도 하나,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 스콧 피츠제럴드(지음), 박찬원(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두 번째로 읽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다. 는 그 명성에 비해 내 감상은 다소 실망스러웠고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을 잘 알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풍속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할 만하달까. 이 책은 단편집이다. 다들 익히 알다시피, 피츠제럴드는 생계를 위해 단편을 엄청 쓴 소설가였다. 하지만 탁월한 문학성을 가진 단편은 몇 편 되지 않고 그의 명성에 비해 단편집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다. 현대의 단편작가들, 가령 레이몬드 카버나 엘리스 먼로 등과 비교해서도 피츠제럴드의 단편들은 뛰어나지 않다. 아마 이 점은 피츠제럴드는 잡지에 실리는 단편이 가져야 하는 흥미로움에 집중된 상상력, 그리고 20세..

정체성, 밀란 쿤데라

정체성 L'Identite'밀란 쿤데라(지음), 이재룡(옮김), 민음사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쿤데라 특유의 문장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간 읽었던 그의 소설들과 비교한다면 읽는 재미가 다소 떨어진다고 할까. 어쩌면 내가 그 사이 나이 든 탓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상당히 오래 전 일이니(찾아보니, 거의 십 년만이다). 꿈은 한 인생의 각기 다른 시절에 대한, 수용하지 못할 평등성과, 인간이 겪은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는 동시대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꿈은 현재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며 현재를 무시한다. (9쪽)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꿈을 꾼다. 샹탈도 꿈을 꾸고 장-마르크는 그 꿈을 위해 익명의 편지들을 그녀에게 보낸다. 그것으..

소유 Possession: A Romance, 수전 바이어트

소유 1, 2 앤토니어 수전 바이어트(지음), 윤희기(옮김), 동아출판사 꽤 오래 읽었다. 강렬한 몰입감보다는 잔잔한 호기심이랄까. 두 시인, 랜돌프 헨리 애쉬와 크리스타벨 라모트의 이야기는, 이들의 흔적을 쫓는 롤런드와 모드의 이야기와 겹치며, 끊임없이 독자를 궁금하게 만든다. 너무나도 문학적인 이 소설은 거의 모든 챕터마다 랜돌프 헨리 애쉬나 크리스타벨 라모트의 작품이 인용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두 시인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실존했던 작가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두 작가는 수전 바이어트가 창작해 낸 가상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 두 작가가 실제 있었던 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이 가상의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들이 놀랍기 때문이다. 서신들하며, 시 작품들은..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 김성곤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 김성곤(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년 예전에 사두었던 책이다. 책 제목에서 풍기듯 새로운 문학 흐름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만드나, 그런 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십 년 가까이 서가에 꽂혀만 있었던 책이다. 그 사이 한 두 번 읽어볼까 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다시 꺼내 읽고 간단하게 리뷰를 쓴다. 실은 리뷰를 쓸만한 내용도 많지 않다. 탁월한 통찰이 있다기 보다는 미국 문학을 중심으로 현대 문학의 흐름을 소개하는 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 세계 문학이나 수준높은 문학 이론을 다루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정도 제반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선뜻 이 책을 권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학부생들에게 권하기엔 너무 일반론에 가까워서, 영문학 전공자 외에..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지음), 이윤기(옮김), 열린책들 하나, 둘, 셋, 넷, ... ... 계단을 올라가듯 만남도, 사랑도, 인생도 그렇게 올라갔으면. 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요즘 초등학생도 알고 있을 터, 꿈은 부질없고 희망은 덧없고 현대의 사랑은 하면 할수록 쓸쓸해지기만 한다. 이 소설 속 '나'도 그렇게 여겼던 건 아닐까. 나는 구석자리에 앉아있었다. 한기가 느껴져 두 번째로 샐비어 술을 시켰다. 나는 자고 싶은 욕망과 이른 새벽의 피로, 그리고 적막과 싸웠다. 나는 희뿌연 창문 저쪽의, 뱃고동과 짐수레꾼, 뱃사람들의 고함 소리로 깨어나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는 동안 바다, 대기, 그리고 내 여행 계획으로 짜인, 보이지 않는 그물이 내 가슴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지음), 김성곤(옮김), 비채 원제는 이지만, 보다 가 더 나아보인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하지만 이 책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단편은 . 잭은 할머니와 30년이나 같이 살았다. 내 친할아버지는 아니었고 플로리다에서 물건을 팔던 이탈리아 사람이었다.잭은 사람들이 사과를 먹고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영원한 오렌지와 햇볕에 대한 비전을 파는 사람이었다. 잭은 마이애미 다운타운 근처에 있던 할머니집에 물건을 팔러 왔다. 그는 일주일 후 위스키를 배달하러 왔다가 30년을 눌러 살았으며, 그 후 플로리다는 그 없이 지내야 했다. - 중에서 (* 위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브라우티건은 사물의 관점에서 종종 서술하는데, 꽤 흥미롭다. '플로리다..

데보라 레비Deborah Levy가 이야기하는 다섯 권의 책

이젠 습관이 된 탓에 시간의 여유만 생기면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글들을 수시로 프린트해서 읽는다. 며칠 전에 읽은 인터뷰에 몇 권의, 인상적인 책 소개가 있어 옮긴다. 다소 생소한 작가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고, 내가 미처 몰랐다는 사실이 다소 미안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라는 메시지로 사회 참여를 강하게 외쳤던 오드리 로드, 영국 출신이면서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 세례를 받은 화가이자 소설가 레오노라 캐링턴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였다. 셜리 잭슨은 이미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기도 한, 고딕 호러 분야에 있어선 최고의 소설가였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데보라 레비는 흥미로운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녀도 이미 영국의 부커상 최종 후보로 여러 ..

면도,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면도안토니스 사마라키스 Antonis Samarakis (지음), 최자영(옮김), 신서원, 1997 전후 그리스 소설이 번역된 것이 드물었던 탓에 1997년에는 꽤 주목받았던 듯싶은데, 지금은 거의 읽히지 않는 듯 싶다. 번역자 또한 소설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이라가 아닌 탓에, 번역된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라키스를 한국에 소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찬사를 받아야 할 것이고 사라마키스의 소설은 다소 거친 번역 속에서도 유쾌하고 감동적이며 왜 뒤늦게 이 소설을 읽었을까 하는 후화까지 하게 만든다. 전후 그리스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그러나 그리스는 고대의 그리스가 아니다. 마치 이집트처럼. 서구 문명의 시작이었으나, 20세기 그리스는 격랑의 현대사 중심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