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조우: 더블린, 리스본, 홍콩, 그리고 서울 - 2009 현대미술국제교류전, 국제교류재단

지하련 2009. 6. 2. 22:53



5호선 충정로역에서 내려 중앙일보사 빌딩까지 걸어갔다. 늦겨울 햇살은 따스했고 찬 바람은 없었다. 군데군데 녹다만 눈들이 도시의 그늘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혼자 정해진 모험을 하듯, 마땅히 해야할 일을 보듯, 가방에 작은 노트와 읽던 책 한 권을 넣고 전시를 보러 간다. 보통 최소 10개 이상의 전시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아는 작가를 만나면 인사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젠 누군가와 함께 보러 가는 것이 되레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조우 - 더블린, 리스본, 홍콩, 그리고 서울'은 전시된 작품들의 수준으로만 보자면, 올해 기억에 남은 몇몇 기획전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지만, 너무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점에서 조금은 아쉬운 전시였다. 설득력 있는 주제가 제시되고, 그 주제에 맞추어 작가와 작품이 선정되었다기 보다는 그 반대의 절차로 준비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넓은 전시장에 비해 작품 수가 적어 디스플레이의 효과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들 대부분은 보는 이의 눈을 자극했고 마음을 움직였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홍수연 - 유기체적 액면 추상의 세계

홍수연, Casting Call-Red#3, 캔버스에 혼합재료, 2005

홍수연, white lush, 165×165cm, 2006


기하학적인 느낌을 주었던 액면 추상의 세계는 홍수연에게 와서는 유기체적인 추상으로 변화한다. 마치 생물의 이름 모를 세포의 형태를 닮은 것같기도 하고, 하늘하늘 거리는 꽃잎을 닮은 것같기도 하다. 색의 대비와 변화는 의도하지 않은 듯 낯선 느낌을 주고 서로 배척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대비와 변화는 갈등의 양상이라기 보다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식의, 마치 의도하지 않은 공교로운 우리 생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홍수연의 작품은 볼수록 흥미롭다.  


석철주 - 전통 산수화의 현대적 재해석

석철주, 생활일기 : 신몽유도원도_캔버스에 수묵, 아크릴채색, 2008


석철주의 작품은 기존 작품들을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재해석의 방식이 계산적이면서 자연스럽고, 현대적 느낌의 마띠에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기억해둘 만하다. 모든 작품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석철주의 작품은 사진 이미지로 보는 것은 실제 작품이 가지고 있는 결이나 느낌, 작품의 풍성함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Anthony Haughey - 경계에서 무너지는 현대적 삶


Anthony Haughey, 엽총탄, 분쟁의 영토 시리즈에서, 컬러 람다크롬 프린트, 123×121cm, 2006

더블린 출신의 사진 작가 Anthony Haughey의 사진 작업은 늘 분쟁의 현장을 담아낸다. 그런데 그 분쟁의 현장 속에서 극적인 스토리, 미학적 효과, 그리고 정치적 메시지까지 담아낸다는 점에서 그의 사진은 주목할 만하다. 황폐한 풍경 속에서의 대비는 현대 세계의 비극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김택상 - 색의 본질을 향한 탐구

김택상 바람의 빛깔, 2007, 캔버스에 물, 아크릴, 바니시



김택상, penetrate(스며들기), water,acrylic,mattvarnish on canvas, 70 x 70 x 4cm


김택상, Shadow of blue, 캔버스에 물, 아크릴, 바니쉬 채색, 70×78cm_2008
(2008년 12월 갤러리 분도(www.bundoart.com)에서 전시한 작품임)


아직까지 이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아마 많은 이들은, 이미 한참 지나간 듯한 추상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평가절하할 지 모르겠지만, 김택상이 가진 평면성과 색채의 깊이는 요즘 보기 드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평면성을 지향하는 모더니즘 미술이 다소 시대에 뒤처진 듯한 인상을 주는 요즘, 김택상의 작품은 그 속에서도 확실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수경 - 혼성된 문화와 그 흔적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2007, 도자기 파편, 에폭시, 24K 금


이수경의 작품도 나의 눈길을 끌었다. 여러 번 잡지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그녀의 번역된 도자기는 처음 보았다. 실제로 보았더니, 마음에 들었다. 잡지에서 보았을 때는, 꽤 흥미로운 작업이구나 였다면, 실제 보았던 그녀의 작품은 흥미로움 이상의 미적 즐거움과, 분명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겠다. 또한 나란히 전시되었던 그녀의 드로잉 또한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신기운 - 시간, 삶, 그리고 바니타스

신기운, 아스트로 보이, 2006, HD영상설치, 2분 12초


작년 미디어비엔날레에서도 만난 신기운의 비디오 작업은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 시간, 존재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보는 이들의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마치 모래시계가 아래로 떨어지듯, 신기운의 비디오 영상은 흘러가는 시간, 마모되는 우리 삶,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허무(Vanitas)를 짧은 영상에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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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된 작가 이외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전에 이 공간을 통해 소개되었거나 앞으로 소개될 작가들이 대부분이라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한다. 전시는 꾸준히 보고 아, 이 작가의 작품은 너무 좋다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리뷰로까지 이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빠뜨리지 않고 리뷰를 하겠다는 생각에 이 전시도 끝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블로그에 올릴 수 있었다. 게으름이라기 보다는 바쁜 내 일상을 탓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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