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67

지고 말 것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고 말 것을가와바타 야스나리(지음), 박혜성(옮김), 문학동네 야스나리의 소설을 읽었다. 초기 단편들을 모은 >. 꽤나 뒤늦은 독서다. 그의 >은 읽지 않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들 대부분 이십대에 다 읽은 것과 달리, 야스나리의 소설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손에 쥐고 읽었다. 대체로 일본 소설가들의 작품에는 뭔가 쓸쓸함이 느껴진다. 한국 소설가들이 만드는 쓸쓸함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 한국 작품들에게 느껴지는 쓸쓸함은, 한 때의 쓸쓸함같다고 할까. 지금은 쓸쓸하지만, 이 쓸쓸함으로 이 모든 것이 물들지 않아, 나는 지금 쓸쓸함 속에 있지만, 이 쓸쓸함 속에서 패배하지는 않을꺼야 라는 식이라면, 일본 작품들에선 인물과 쓸쓸함은 하나가 되어 어떤 배경이 된다고 할까. 자신을 드러..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디디에 에리봉(지음), 이상길(옮김), 문학과지성사 1. 한국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 의아했다. 읽고 난 다음 이해할 수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프랑스 지방 도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동성애자 지식인이었으며, 그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며 스스로를 고백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트렌디한 지식인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었다. 나쁜 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알라딘 서점에서는 21세기 최고의 책들 중 한 권으로 추천되었고,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2021년도에도 여러 일간지에서 동시에 추천도서로 올라왔다는 점에서, 과연 이 책이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한국의 독자들 중에서 얼..

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나주에 대하여김화진(지음), 문학동네 '나주'가 그 '나주'라 생각했다. 주인공이 그 곳에 가서 겪는, 일종의 여행기 같은. 전라남도 나주시. 하지만 이 단편의 나주는 사람이름이었다. 그것도 죽은 남자친구의 전 애인 이름. 1. 소설을 쓸 때, 작중 인물들의 이름은 어떻게 짓는 걸까. 나는 이게 귀찮고 고민스러워서, '그'나 '그녀', 혹은 'K'나 'P'로 자주 했다. 수십년 전 습작을 몇 편 쓰지도 않았지만.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이름들이 특별하진 않았다. '영은'이나 '은영'같은 이름은 너무 평이하지 않나 하고 여겼다. 도리어 '김화진'이라는 이름이 더 소설스럽다고 할까. 예전에 알던 어느 소설가의 장편 소설에는 이름만 바뀐 실제 인물들이 나와서, 그 실제 인물들과 그 소설가를 비난하는 술자리에 ..

천 개의 베개, 노동효

천 개의 베개노동효 (지음), 나무발전소 EBS 세계테마기행을 보다가 저자 노동효를 본 적이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열여섯살 무렵 잤다는 마산의 철교 밑 방범초소가 어딘지 궁금해진다.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몇 개 되지 않는 철교 밑에 방범초소가 있을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족의 일로 마산을 오갈 뿐, 오래 머물러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혼자 잘 놀지만, 다른 곳에 가서, 그 어느 곳의 소속이 아닌 채 혼자 지낸다는 건 상상해보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곳들을 떠돌아다닌다는 건. 그것을 사람들은 여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여행을 꿈꿀 뿐, 여행을 떠날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요즘 나로 하여금 여행 생각을 하게 만드는 ..

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메이블 이야기 H is for Hawk 헬렌 멕도널드Helen Macdonald (지음), 공경희(옮김), 판미동 해가 바뀔 때마다 외국 저널에서 선정해 발표하는 올해의 책이나 음반, 영화를 찾아보곤 했다. 하긴 그 땐 올해 최고의 전시 리스트도 읽고 관련 기사를 읽거나 스크랩을 했으니, 그런 시간들이 어떻게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 내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늘 읽고 배워야 할 것들이 쌓이고 있는데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번역 출간된 책이다.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바로 구입했으나, 올해 초에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사고 난 다음 두세번 정도 읽으려고 했으나, 초반을 조금 읽다가 그만 두었다. 잘 읽히..

살아있는 산, 낸 셰퍼드

살아있는 산 - 경이의 존재를 감각하는 끝없는 여정낸 셰퍼드(지음), 신소희(옮김), 위즈덤하우스 술자리에 남북 통일의 여러 이유들 중 하나로 '개마고원에서 하루나 이틀 야영(캠핑)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한반도 면적의 약 20%를 차지하며 평균 해발 고도가 700미터에서 2000미터 사이에 있는 고원지대.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곳. 이 책을 읽으며 '개마고원'을 떠올렸다. 한국도 캐언곰 같은 곳이 있다면 아마 개마고원일 것이라고. 산을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등산 장비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20세기 중반에 낸 셰퍼드는 참 잘 다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남자이지 않을까 추정했다. 가끔 여자 이름을 쓰는 남자도 있는 법이니. 하지만 여성 작가였다니. 아래는 책을 읽으..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스가 아쓰코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스가 아쓰코(지음), 송태욱(옮김), 문학동네 이것으로 스가 아쓰코의 수필집은 다 읽은 건가. 지금 찾아보니, 문학동네에서만 번역된 줄 알았더니, 그 이후 다른 출판사에서 몇 권이 더 번역되었구나. 스가 아쓰코의 수필이 주는 매력은 분명하다. 그냥 잔잔하다. 읽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때로 이탈리아 문학 이야기도 나오고 일본 이야기도, 이탈리아 친구들 이야기, 카톨릭 좌파와 코르시아 서점 이야기도. 이 책은 이탈리아 친구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가령 이런 시를 쓴 친구이야기도. 나에게는 손이 없네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어줄 ... ... 다비드 마리아 투롤도(David Maria Turoldo)의 첫 번째 시집 에 실린 시다. 신부이면서 시인이었던 투롤도. 남편이 죽고 처..

샤이닝, 욘 포세

샤이닝욘 포세(지음), 손화수(옮김), 문학동네 어느새 눈이 앞 차창을 온통 덮어버렸다, 나는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이제 보니 눈은 그쳤고 앞에 보이는 땅은 하얀 눈으로 덮였다, 숲 속 나무가지에는 하얀 눈이 쌓였다. 아름다웠다. 하얀 나무, 하얀 땅. 이제 차 안이 기분 좋게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차 안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19쪽) 하얀 눈 속에 갇히면 어떨까. 온통 하얀 세상. 그 하얀 공간 속에서 혼자 고립되어 잠들어갈 때, 어떨까.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단단하고 슬프다. 결국은 가족 뿐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가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상처 입고 있는데 말이다. 세상은 하얗고 서로가 있다는 걸 알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에어리얼, 실비아 플라스

에어리얼실비아 플라스(지음), 진은영(옮김), 엘리   오래 전에 사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읽다 그만 둔 채 서가에서 먼지만 먹고 있는데, 나는 최근에 실비아 플라스의 유고 시집인 >을 읽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너무 아파서 힘들었다. 젊었을 때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통스러움이 언어들 속에서 묻어나와, 시인 테드 휴즈를 미워하게 되었다.  시집에서 세 편을 옮긴다. 최고의 시는 역시 다. 영어로 읽기를 권한다. 문학 작품에 대한 번역은 한 단어 한 단어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시인 진은영의 번역이 상당히 좋긴 하지만.  불모의 여인 텅 비어 있어, 나는 가장 작은 밠소리에도 울린다. 기둥들, 주랑 주랑 현과들, 둥근 천장..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유디트 샬란스키(지음), 박경희(옮김), 뮤진트리   기대 이상의 독서였다. 서정적인 서술과 묘사는 마음을 움직였다. 이젠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쓴 글들 모음집인 이 책은 수필이면서 픽션이며 다큐멘터리였다. 내가, 혹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 이끌며 기록의 소중함을 알린다. 그러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흔적으로 남았거나 아예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적고 노래한다.   시의 파편들이 끝없는 낭만주의의 약속임을. 아직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현대의 이상理想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시예술은 지금까지도 어떤 문학 장르보다 더 함축적인 공허, 의미를 증폭시키는 여백을 갖고 있다. 구두점들은 단어들과 함께 유령의 팔다리처럼 생겨나 잃어버린 완벽함을 주장한다. 원형은 온전히 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