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75

주말 오전의 첼로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음반을 꺼내 듣는다. 대체로 음반들은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꺼내 듣는 게 전부다. 먼지 쌓인 음반을 닦으며 슬픈 표정으로 웃게 된다. 한 두 번 듣겠다고 지금도 음반을 사고 한 번 읽겠다고 책을 산다.결국 헤어질 운명인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시인 남편은 바람이 나 집을 떠나고, 사랑 속에서 사랑을 잃고 시를 쓴 실비아 플라스도 죽고, 몇 년 후 그녀의 남편과 사랑에 빠져 살림을 차렸던 시인 아시아 베빌도, 테드 휴즈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딸과 함께 죽는다. 사랑이 뭔지. 이젠 테드 휴즈보다 실비아 플라스가 더 유명해졌지만, 사후의 명성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첼로 소리는 주말 아침과 참 잘 어울린다. 고통받고 있는 마음을 가..

듀안 마이클, 내 영혼의 먼지,들

듀안 마이클 Duane Michals. 그의 사진을 눈 그친 창 밖 화이트톤의 풍경과 대비해 본다, 읽는다, 느낀다. 시를 쓰며, 시인이었던 그녀에게 듀안을 아냐고 물었지만 모르다며 고개를 저었다. 조각을 전공하고 디자인을 하던 그녀에겐 물어볼 새도 없이 철없던 날 버렸다. 그리고 몇 년을 울었다. 하지만 듀안을 알던 내 지인들은 모두 등단하지 못했고 그림은 접었고 아이 아빠가 되거나 결혼하지 않았다, 못했다. 너무 자신만만했던 우리들의 호기심은 외부로만 향했을 뿐,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뒤늦은 후회와 반성으로 뒤범벅된 채로 듀안의 사진을 보며, 아, 어떻게 하면 소리없이 풍성해질까, 어떻게 하면 이 사소한 울적함마저 저 우주의 침묵과 만나게 할 수 있을까, 과연 내 신비를 그녀의 신..

새벽 5시, 빛의 슬픈 영역 속으로

나이가 들수록 변해간다. 몸이 변해가는 걸 적응하기 위해 내 영혼을 얼마나 많은 것들과 싸우고 있는 걸까. 문득 다시, 올해 글을 쓸까 생각했다. 수십년만에 만난 대학동기들에게 이 나이에 한 번 등단해보자, 하고 취기에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글을 잘 썼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가 글을 쓰지 않게 된 건, 누군가의 삶을, 그것이 허구라 할 지라도 과연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끊임없이 되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그 고통과 번민의 삶을 나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은 가능한가 물었다. 가령,  *    *  그녀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아침을 차려 주었다. 그는 그 전날도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사랑, 사랑, 나의 계절 Love, love, my season

사랑, 사랑, 나의 계절 Love, love, my season. -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의 마지막 연. 이렇게 노래했던 그녀는 30살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는다. 남편인 테드 휴즈Ted Hughes의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류의) 이야기 한 두 개를 알고 있다. 사랑, 사랑, 나의 계절인 셈이다.  그런데 그 계절이 사라지니까, 떠나야지. 그 계절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음을.시인 박인환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했고 기욤 아폴리네르는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고 했는데, 실비아 플라스는 사랑도 가고 나도 간다고 ... 요즘 너무 우울해져서 까닭없이 눈물이 나고 슬퍼지고 가라앉는다. 이유는 대강 알 듯하지만, 극복하는 게 쉽지 않구나.

때 늦은 우울

얼마 전 길을 가다가 울 뻔했다. 20대 시절엔 자주 있던 일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선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말이다. 그 땐 정말 해 지는 오후만 되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눈물을 참으려고 술을 마셨다. 내 나쁜 술버릇은, 변명처럼 그렇게 만들어졌다. 장석남의 시를 좋아했는데, 술에 취하면 다들 그렇듯 기형도의 을 소리내어 읽었다. 조금 나이가 들자, 허수경의 을 읽었다. 킥킥거리며, 당신, 당신 그렇게 부르며 울었다.  시 따위 쓰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소설에 등장할 만한 사람들이 내 꿈에,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하는 때도 가끔 있긴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아주 가끔 서교동 성당 안으로 한 소녀의 뒷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이 참혹스러울 때가 있을 뿐이다.    새벽..

마지막 외출, 조지수

마지막 외출 -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액자 소설이지만, 그 액자는 단단하지 않고 그 안은 너무 진지했다. 사랑 이야기지만, 과연 사랑이야기일까. 늘 그렇듯 사랑은 기만적이다. 그건 일종의 허위인 탓에, 치명적으로 쾌락적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사랑에 빠진 남녀는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의 떨림과 흥분으로, 중반 이후부턴 기만적인 믿음과 소유욕으로 가득찬 육체의 쾌락으로 이어지다가 차갑게 식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과 육체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 식어버린 마음과 그 가라앉음을 견디지 못해 헤어진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고 슬픈 이별로 포장하는 탓에, 세상에는 사랑 노래로 흘러넘친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있..

쓸쓸한 아픔

팔짱을 끼고 베갯머리에 앉아 있자니 천장을 보고 누운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죽을 거예요.여자는 긴 머리채를 베개 위에 풀어두고, 그 속에 부드러운윤곽의 오이씨 같은 얼굴을 가로누인다. 새하얀 빰에 따뜻한 혈색이 알맞게 비치고 입술 빛깔은 역시나 붉다.도저히 죽을 사람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죽을 거예요, 분명하게 말했다. 나도 이제 죽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벌써 죽는 거야?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어보았다. 죽고 말고요. 여자는눈을 크게 떴다. 커다랗고 물기 어린 눈이었다. 긴 속눈썹에에워싸인 곳은 온통 검었다. 그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친다.- 나쓰메 소세키, (>, 김석희 옮김, 이소노미아)중에서   나를 귀찮게 하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L'annee derneire a Marienbad (Last Year At Marienbad) 알랭 레네(Alain Resnais)감독, 알랭 로브그리예 Alain Robbe-Grillet 극작 Giorgio Albertazzi, Delphine Seyrig, Sascha Pitoeff 출연 실은 이 정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들마저도 이 영화 와 비교한다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상당수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역대 최악의 영화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은 이 영화를 누벨 바그 최고의 영화로 평가하지만, 막상 직접 본다면, 더구나 지금, 2023년에 보았다면,..

관측, 이영주

관측 이영주 지구의 중력이 인간의 피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피는 심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빛이 폭발하면 별을 볼 수 있다.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곳에 잔뜩 힘주고 서 있는 것이 어둠으로 가는 길이었나. 렌즈 안으로 푸른 숲이 번진다. 수은이 빛나는 의자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랑 상관없이 노래를 불러도 되지?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헤어지는 노래를 사랑을 담아 부른다. 뜨끈하고 이상하고 끈끈해. 새벽에 걸어 들어온 수목림 내가 걷는 숲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피가 물들어 있다. 망원경에 입김이 피어오른다. 물큰하게 젖은 잎들이 흔들린다. 자꾸만 이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지구에서 흐르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너의 혈액 때문이었나. 붉게 물든 발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인가. 크..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32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 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 있다. 형태를 만져 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10년 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