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179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유디트 샬란스키(지음), 박경희(옮김), 뮤진트리   기대 이상의 독서였다. 서정적인 서술과 묘사는 마음을 움직였다. 이젠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쓴 글들 모음집인 이 책은 수필이면서 픽션이며 다큐멘터리였다. 내가, 혹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 이끌며 기록의 소중함을 알린다. 그러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흔적으로 남았거나 아예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적고 노래한다.   시의 파편들이 끝없는 낭만주의의 약속임을. 아직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현대의 이상理想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시예술은 지금까지도 어떤 문학 장르보다 더 함축적인 공허, 의미를 증폭시키는 여백을 갖고 있다. 구두점들은 단어들과 함께 유령의 팔다리처럼 생겨나 잃어버린 완벽함을 주장한다. 원형은 온전히 갖..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지음), 곽광수(옮김), 민음사   Natura deficit, fortuna mutatur, deus omnia cernit. 자연은 우리들을 배반하고, 운명은 변하며, 신은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155쪽)   조그만 나의 영혼, 방랑하는 어여쁜 영혼이여, 육체를 받아들인 주인이며 반려인 그대여, 그대 이제 그 곳으로 떠나는구나. 창백하고 거칠고 황폐한 그 곳으로. 늘 하던 농담. 장난은 이제 못하리니. 한순간 더 우리 함께 낯익은 강변들과, 아마도 우리가 이젠 다시 보지 못할 사물들을 둘러보자 ... ... 두 눈을 뜬 채 죽음 속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자. ... ... (236쪽)  가끔이지만, 지금 죽으면 어떨까 하곤..

세상의 모든 시간, 토마스 기르스트

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지음), 이덕임(옮김), 을유문화사   우연히 방문한 서점에서 산 작은 책. 의외로 재미있고 유용했다. 독후감을 쓰려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의 저자이기도 했다. 글 스타일도 비슷하다. 이 책은 작은 칼럼들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다. 아무 페이지나 열어 읽어도 된다. 문화 칼럼 정도라고 할까. 다양한 작품들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데, 읽을 만하다.  그러고 보니, 뭔가 하나로 모아지진 않는다. 현대 문화/예술에 대한 트렌디한 감각을 알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 대단한 통찰을 얻기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카페에 혼자 앉아 바깥 풍경을 보면서 읽기 좋은 책이다. 책의 시작은 상당히 좋지만,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도 흠이..

문득, 그리움

가을이 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바빴고 여유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심했고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한강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누구에게도 추천을 받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의 르 끌레지오를 사랑했지만, 그보다는 밀란 쿤데라가 받을 것이라 여겼다. 모디아노가 받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키는 받지 못할 것이며, 오에 겐자부로의 목소리는 일본 속의 소수자들을 대변할 뿐이었다.   창원에 내려와 도서관에 잠시 들렸다. 도서관 창으로 숲이 보이고 가을이 보였다. 고향 집으로 가면서 노란 은행잎을 책 속에 넣었다. 추억이 떠올라 슬펐다.

마지막 외출, 조지수

마지막 외출 -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액자 소설이지만, 그 액자는 단단하지 않고 그 안은 너무 진지했다. 사랑 이야기지만, 과연 사랑이야기일까. 늘 그렇듯 사랑은 기만적이다. 그건 일종의 허위인 탓에, 치명적으로 쾌락적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사랑에 빠진 남녀는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의 떨림과 흥분으로, 중반 이후부턴 기만적인 믿음과 소유욕으로 가득찬 육체의 쾌락으로 이어지다가 차갑게 식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과 육체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 식어버린 마음과 그 가라앉음을 견디지 못해 헤어진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고 슬픈 이별로 포장하는 탓에, 세상에는 사랑 노래로 흘러넘친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있..

지난 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 회고록

지난 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지음), 이미애(옮김), 민음사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는다. 그녀의 >을, ... 고등학교 때 읽은 후, 산문집 몇 편을 읽었을 뿐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다시 시도하고 있지만, 겨우 읽은 게 이 짧은 회고록이다. 회고록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고 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 왜 다 죽는 걸까.   인생이 우리가 계속 채워 가는 그릇이라면, 그렇다면 내 그릇은 의심할 바 없이 이 기억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잠이 들락 말락 한 상태에서 세인트아이브스의 아이 방 침대에 누워 파도가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며 해변에 밀려오고 노란 블라인드 뒤에서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다. 바람이 블라인드를 휘날리며 바닥의 작은 도토리를 끌..

말하는 보르헤스,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

말하는 보르헤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송병선(옮김), 민음사  Scipta manet, verba volant 입에서 나온 말에는 날개가 있지만, 글로 쓰인 말은 그대로 있다. - 12쪽  꾸준히 보르헤스를 읽는다. 보르헤스를 만나는 동안, 무척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 주제에서 저 단어로 옮겨다니다. 영국 문학을 이야기하다가 독일 철학자를 꺼내고 다시 고전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문학을 이야기하다가 동시대 아르헨티나 작가를 꺼내기도 한다. 이런 여행은 보르헤스만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    영국의 전형적인 스타일은 '적은 말수', 즉 사물에 대해 조금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익스피어는 과장이라는 은유법을 즐겨 사용하던 작가입니다. (20쪽) 전혀 영국스..

마르그리트 뒤라스

"만약 우리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건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스스로 중요한 모순을 잊어버린다면, 또 끊임없이 이 모순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요. 한낱 이야기꾼은 될 수 있을 겁니다. 모순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 안이함에서 오는 역겨움만 있을 뿐이지요." - 마르그리트 뒤라스 (* 알랭 비르통들레의 > 중에서)

어떤 종류의 슬픔은 언제나 늘 우리 곁에 ...

"There is a kind of sadness that comes from knowing too much, from seeing the world as it truly is. It is the sadness of understanding that life is not a grand adventure, but a series of small, insignificant moments, that love is not a fairy tale, but a fragile, fleeting emotion, that happiness is not a permanent state, but a rare, fleeting glimpse of something we can never hold onto. And in tha..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욘 포세(지음), 박경희(옮김), 문학동네   > 이후 두 번째로 읽는 욘 포세의 소설이다. 비슷한 느낌이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그리고 페테르는 성냥갑을 집어 건넨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사람은, 요한네스와 페테르는, 나란히 앉아 담배를 비우며 바다 저멀리 서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돌멩이 두 개가 페테르의 몸을 그냥 통과해 날아가다니 몹시 이상한 일이군, 아니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 않나, 그냥 착시현상이겠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걸,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페테르에게 그의 몸을 만져봐도 되냐고 물어봐야 하려나, 그럴 수는 없어, 페테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지 그렇게까지는 못하지, 페테르에게 몸을 만져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