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한국사진이론의 지형>>(김승곤 외 지음, 홍디자인출판부, 2000)에 실린 이경률의 <현대미술과 사진적 레디메이드>의 일부를 정리하면서 덧붙인 글이다.
나는 예전에 <오브제 미술Objet Art, 그게 뭐지?>라는 짧은 포스팅을 통해 레디메이드와 오해하기 쉬운, 혹은 그와 동일한 양식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뒤샹은 초현실주의자의 '발견된 오브제'와는 전혀 다르고 말한다.
그러나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발견된 오브제’와는 다르다. 이 차이를 뒤샹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레디메이드는 개인 취미의 문제이다. 발견된 오브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른바 발견된 오브제가 아름다운 것인가 특이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기호인 것이다. 기성품의 선택은 미적인 즐거움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선택은 시각적인 무관심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은 전후 서구 미술, 특히 팝 아트 계열의 작가들과 신사실주의 및 개념미술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출처: 월간미술 - http://monthlyart.com/encyclopedia/%EB%A0%88%EB%94%94%EB%A9%94%EC%9D%B4%EB%93%9C/
아래는 이경률의 글에서 인용된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설명이다.
"뒤샹 타입의 방식은 어떤 하나의 오브제를 선택한 후 상용적 기능으로부터 미적이고 개념적인 기능을 위해 그것에 제목을 부여하는 것이다."
- Marco Livingstone, Le Pop Art, ed Mazan, Paris, 1990, p.10
뒤샹은 일상 생활의 오브제를 그들의 본원적 기능을 박탈하면서 미적인 공간 속으로 이식시키고 있다. 그때 레디메이드는 "하나의 언급(citation)으로, 그 효과는 제시된 오브제 근처에서 원래의 텍스트와 다른 또 다른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오브제는 새로운 텍스트에 완벽히 통합된다."
- Didier Semin, 'Boltanski', Art Press, Paris, 1989. p.42
레디메이드은 너무 잘 알려진 개념이라, 위의 인용문만 읽어도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사진에서의 레디메이드, 즉 사진적 레디메이드의 예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의 예를 들고 있다. (실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들이 레디메이드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보다 다른 쪽으로 이해되는 작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진적 레디메이드가 순수하게 개념적으로 이용될 경우, 사진 이미지 그 자체가 외시하는 내용물 혹은 그 미학적 가치는 예술 작품의 궁극적인 목적과는 이론적으로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의 가장 좋은 예는 아마추어 사진을 이용하여 제작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사진 설치 작품이다. 볼탕스키는 스스로를 화가라 말하듯이 그에게 있어 사진은 그림을 위한 진정한 표현적 도구가 된다. 왜냐하면 사진은 관객에게 과거 사실에 대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그럴듯한 이야기를 스스로 꾸미게 하는 서술적이고 또한 사실적인 측면, 다시 말해 사건의 절대적 신빙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173쪽)
"만약 레디메이드가 뒤샹에게 어떤 오브제(선택)의 욕구 속에서 이해된다면 볼탕스키의 레디메이드는 자격의 재부여 혹은 재입력(rehibilitation)의 진행과정 속에서 시행된다. 즉, 반복적 활용 속에서 볼탕스키의 재생된 사진 이미지는 그 어떤 원본으로부터 판박이와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이 제거됨과 동시에 모델의 모든 정체성으로부터 이탈되고 또한 예술 세계의 입성에 의해 새로운 자격을 얻게 된 이미지이다. 그들의 행태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감각적 방법은 원본의 최초의 함축적 의미나 영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재된 텍스트(intertext)로부터 시행된다."
결국 볼탕스키 작품에서 작가는 "이러한 재활용을 잘못된(어울리지 않는) 자료적 이용에서 (...) 원본의 텍스트가 점진적으로 사라짐에 따라 (예술적) 가치가 발생하는 좋은 활용으로 바꾸고 있다."
- Didier Semin, 'Boltanski', Art Press, Paris, 1989. p.44
Christian Boltanski
REFLEXION, 2000
400 BLACK MIRRORS, 9 WHEELED RACKS WITH SUSPENDED TRANSPARENCIES ON CLOTH SHEETS.
EACH RACK: 83 X 52 X 20 IN. ( 210.8 X 132.1 X 50.8 CM )
1960년대 말 볼탕스키의 예술적 활동은 이미 그림, 조각, 설치, 퍼포먼스, 영화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시작된다. 당시 그의 예술적 의도는 삶, 죽음, 부조리 등과 같은 인간 운명의 필연적 테마를 강렬한 표현양식으로 혹은 부조리적인 반복된 행위를 하면서 보다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있었다.(특별히 예술적 교육을 받지 않은 그의 표현은 다소 어설프고 조잡스러웠다). (174쪽)
CHRISTIAN BOLTANSKI
L‘album photographique de la famille de B, 1991
105 s/w photographs in metal frame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사진적 그림(Photobilder)은 그가 사진과 그림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그 사이를 뛰어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처럼 보이지만, 유화이다. 하지만 이 유화의 시작은 사진임에 분명하다.
리히터, <엠마> 캔버스에 유화, 1966
Gerhard Richter
Ema (Akt auf einer Treppe) / Ema (Nude on a Staircase)
1966 200 cm x 130 cm, Oil on canvas
"이 그림은 뒤샹이 보여준 마지막 그림들을 참조하면서 실행된 작품으로(사진으로부터 그려진 리히터의 모든 사진적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적 행위가 말해주는 확실한 표명에 의해 레디메이드 개념에 대한 분명한 문제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의 그림적 시행은 이상화되고 또한 사물화된 오브제의 부정을 의미하는데 이는 곧 뒤샹의 계열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벤저민 부클로(Benjamin H.D.Buchloh), 1993
Gerhard Richter, Betty betty, 1977
아, 이 작품도 유화다!
* 읽은 것을 그냥 노트를 하면서, 작품 이미지를 찾아 붙여보았다. 두서없지만. 게하르트 리히터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에 대해선 조금 더 정리해 봐야겠다.
'만약 아시아 예술가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서구의 시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적인 게 아닌 자기 식민화일 뿐이다'
멋집니다.
제가 작년에 국내 모 예술제에 다녀왔는데 엄청나게 실망하고 왔다죠.
솔직히 한국작가들이 창조해 낸 거라면
그래도 작품속에 타국의 작가들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느낌이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팔기위한 작품을 내놓는 자리의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 예술제를 한국전체의 작가들의 작품에 확대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거의 70%는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만 담고 있더군요.
(다행이 30%정도는 한국의 미가 물씬 느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굳이 한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게다가... 앤디워홀 모작은 왜 그리도 많던지,,
여튼 그 이후로 음악이나, 옷이나 주변에 모든 것들을 접할 때마다,
서구사회와는 구분되는, 그리도 중국과 일본과는 구분된 한국적인 특성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 편협한 시야로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발행하신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정체성identity가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는 소극적인 듯 합니다. 그리고 타인들과 뚜렷하게 두른 '개성적인 자기'를 드러내면 도리어 소외를 당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요. 미술 사회(일종의 장 champ)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 곳도 한국 사회의 일부인지라... 막상 부딪혀보니,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개성적인 작품을 그린 것도, 그 작품으로 인정 받는 것도 ...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헤쳐나가야 되는데, ... 여튼 대중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 순수 미술 분야인 듯합니다. ~.. ^^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