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란 영혼

 

호로고루(瓠蘆古壘)은 한자 의미 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 '표주박처럼 생긴 오래된 작은 성'이라는 뜻이다. 지난 토요일, 요즘 일상이 너무 힘들어 바람을 쐴 겸, 언제나 궁금했던 연천 호로고루에 다녀왔다. 그러나 진입로를 찾기 어려웠고 좀 어수선한 분위기랄까. 옆에 임진강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다. 9월달에는 해바라기를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없고 10월에 피웠던 것으로 보이는 코스모스도 거의 없었다. 

 

 

기원 후 5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남아있지만, 그 외의 것은 흔적만 남았고 이도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일종의 작은 군사 기지 같은 개념으로 강을 끼고 고구려 최남단 경계선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입구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는 것이다. 북에서 가져온 것인데, 실제 광개토대왕비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라 볼 만하다. 

 

 

강 수심은 얕았고 폭은 넓었다. 근처에 몇 개의 까페가 있었고 그 중 한 곳에 들려 차 한 잔을 했다. 도망치듯 나온 것이라 마음은 불안했다. 밀린 일들이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갔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과 갈등들이 눈에 보였다. 

 

 

최근 빠져든 현대 물리학의 여러 이론들이나 학설들을 보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운동만 있을 뿐이며, 그 운동의 속도에 따라 시간의 속도로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이미 셋팅된 어떤 곳이다. 마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서 시간을 평면처럼 본다고 말하듯, 우리는 결코 우리를 넘어선 그 세계를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저 우주의 끝에 가 닿을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이미 그리스 비극에서도 다루었던 주제이지 않은가.

 

최근 문재인 정부에서의 군비 증강을 보면서 '화력 덕후', '포방부'와 같은 별명이 비단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 시대, 그 이전부터 한반도는 '포'나 '화살'에 집중했던 민족이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마치 와인너리의 포도처럼 나라도, 그 나라의 사람들도 이미 정해진 운명을 사는 것이다. 지금도 양궁은 세계 최고이지 않은가. 한국산 활이 최고이듯, 양궁 선수들도 최고인데, 이건 애초부터 우리 민족은 활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저 호로고루에 있었던 고구려 병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그리고 나는. 나는 어떻게 남은 생을 살고 어떤 말을 해야 하며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늘 내일은 물음표처럼 나에게 다가오는데, 현대의 여러 이론들은 그 내일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하니, 나는 어쩌면 좋을까. 내 스스로 나를 개선시키려는, 내 앞에 놓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용기나 의지도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하는데 말이다. 

 

참고로 호로고루는 해바라기가 피는 9월에 가면 좋겠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으니 미리 동선을 짜고 움직여야 된다. 사진 몇 장 찍고 한 바퀴 도는 데 길어도 1시간이면 족한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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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말하다 The Conscience of a Liberal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지음), 예상한, 한상완, 유병규, 박태일(옮김), 현대경제연구원BOOKS, 2008년

 

 

‘미래를 말하다’라는 번역서의 제목은 어울리지 않는다. 폴 크루그먼이 미래를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지 않고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어떤 조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대신 이 책을 통해 지난 약 백 년간의 미국 정치 지형의 변화와 이로 인해 심해진 경제적 불평등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한국 사회도 미국 사회와 비슷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고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8년도에 번역 초판이 나오고 2009년에 나온 32쇄본이다. 엄청 팔린 책인 셈이다. 폴 크루그먼의 지명도 때문일 테지만, 많은 이들이 이 책을 구입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의외로 여겨진다. 더구나 개정판이 나올 정도니, 한국 사람들이 미국 정치/경제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말하는 미래가 궁금해서 산 건 알 턱없지만, 잘 알지 못했던 미국 상황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처럼 양당 체제가 공고화해지고 극우화되는 보수야당의 모습이 미국과 같아서 흥미롭게 비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찾아보니, 개정판도 품절 상태이긴 하지만)

 

저자는 진보주의(liberalism)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보수주의(conservatism)을 비판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정치적이며, 이 점에서 저자의 노선은 분명하다. 책의 결말부에서 그는 '당파성'을 이야기할 정도이니.

 

정치학자 놀런 매카티(Nolan McCarty), 키스 풀(Keith Poole), 그리고 하워드 로젠탈(Howard Rosenthal)은 역사는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하나가 되어 일종의 ‘춤’을 춰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이들 학자는 국회의원들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복잡한 통계 기술을 사용했다.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화당이 진보적이 되어 민주당과의 의견 차를 좁히면 소득 격차가 줄고, 1950~60년대에 보았던 것과 같은 초당적 제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화당의 우파 성향이 강해지면 오늘날과 같이 양당의 양극화가 깊어지고 소득격차도 확대된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같이 춤을 추도록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20쪽 ~ 21쪽)

 

실제로 미국 전후 중산층 사회는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행정부 정책의 일환인 전시 임금 통제를 통해 몇 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만들어졌다. 이 놀라운 사실을 처음 주장한 경제사학자인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과 로버트 마고(Robert Margo)는 이를 대압축(Great Compression)이라고 불렀다.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 전시통제가 사라지자마자 불평등이 예전 수준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 행정부가 이뤄낸 비교적 평등한 소득 분배는 그 후로도 30여년 이상 지속됐다. 이는 제도와 규범, 그리고 정치적 환경이 소득 분배에 끼치는영향이 우리가 경제학 입문 과정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객관적인 시장의 힘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23쪽)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은 언제나 선거철만 되면 ‘경제가 문제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가 늘 문제다. 즉 그들 정치인이 문제인데 왜 경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정치만 제대로 돌아간다면 한국의 경제는 순항할 것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저자의 입장은 책 초반에 그 윤곽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공화당의 우경화는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결과로 나타났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 그것이 경제공황과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효과는 전후에까지 이어지며 미국의 가장 안정적인 시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케인즈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고 할까). 이 책은 이 주장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각 연대별로 미국 정치 상황이나 경제 여건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어떻게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는 건 아니고 미국의 보수주의를 공격하기 여념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21세기 초 미국의 여러 모순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주의자인 반면,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대부분 급진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333쪽)

 

다시 말해 진보주의는 복지국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주의는 민주주의와 법치도 추구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피부색이나 종교, 성적 취향이 다른 시민들에게 똑 같은 권리를 부여하기 꺼리는 일부 시민들을 이용하는 정치적 전략을 핵심으로 한다. 이 책에서 기록한 것처럼 보수주의 운동은 애초부터 반민주적이며 권위주의에 매료되어 있었다. (335쪽)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건 196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다 보면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나 팝 아트에 대해서, 향수나 부러움의 눈길로 보게 되는데, 실제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미국인 다수, 어쩌면 대부분에게 꾸준한 경제 발전이 가져다 준 만족감보다 미국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범죄율은 높아졌고, 도시는 폭동으로 폐허가 됐다. 풍요의 시대에 자란 젊은이들은 머리를 기르고, 마약을 복용하며, 혼전 성관계를 맺었다. 거리 곳곳에서는 베트남전을 비난하는 시위참가자들을 볼 수 있었다. 현재의 역사가들은 1960년대의 혼란 속에서 두 가지 경향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강도들을 움직이는 것, 급진적인 학생들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히피들이 움직이는 이유와 중년층 반전 운동가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절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는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108쪽)

 

아! 그 사랑이 가득했던 여름! 특정 연령의 미국인들, 곧 그들의 젊은 시절이나 그때 당시 원했던 삶을 회고해보는 베이비부머들에게 1960년대는 일종의 향수로 다가온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대항문화(counterculture)에 대한 당시 미국인들의 반응은 대부분 감탄이 아니라 공포와 분노였다. (124쪽)

 

실제로 실업률이 3.5%에서 6%까지 올랐던 1969~71년, 닉슨 통치 하의 경기침체는 알타몬트(Altamont, 성공적인 우드스톡 페스티벌 몇 달 후 열린 페스티벌로 살인과 강간, 마약 문제로 얼룩졌던 행사 - 역주) 페스티벌에서 살인도 막지 못했고, 히피운동을 저지하지도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25쪽)

 

미국의 중산층이 무너진 지는 오래되었다. 한국도 그 비슷해 보인다. 예전과 달라졌다.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서울과 수도권과도 격차가 생기며, 서울 안에서도 강남과 비강남의 차이가 심각해지고 있다. 어쩌면 이 현상은 전세계적인 현상일 지도 모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폴 크루그먼에게 그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보적인 정권과 적극적인 시장 개입, 그리고 복지 정책의 수립과 실행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그것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미국 역사에서 그랬던 시절, 그나마 살기 좋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나 부모님의 지위가 더 중요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RDK, 즉 ‘멍청한 부잣집 아이들(rich dumb kids)’이라고 부르던, 성적이 하위 25%이면서 부모님의 지위가 상위 25%에 속하던 학생들은, 성적은 상위 25% 안에 들지만, 부모님의 지위가 하위 25%에 속하는 학생들에 비해 대학을 졸업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평등한 기회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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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아니 지난 주부터였나. 월스트리트저널에서 페이스북에 대한 비판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당히 의외라고 할 수도 있겠고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 기사는 국내 IT/스타트업 전문 저널이나 아는 사람들끼리 공유되는 기사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바이라인네트워크 - 월스트리트저널의 ‘페이스북 저격’…5가지 잘못 뭐길래

 

그리고 며칠 전 프랜시스 하우건이 미 상원의회 청문회에 나와 페이스북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페이스북이 얼마나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지, 인스타그램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페이스북은 해결할 수 없는 조직임을 가감없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자 발칵 뒤집혔다. 실은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최초로 접한 것이 페이스북의 지인들을 통해서이니, 이 또한 아이러니하지만.

 

직썰이라는 온라인매체에 올라온 기사를 공윺한 다음, 국내에는 어떻게 기사화되었는지 봤더니, 국내 언론에서는 별 내용이 없다. 한국에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마 그걸 기사화할 역량이 기자들에게는 없거나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사용하면서 늘 신기하게 여겼던 사실은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의 피드백만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반대는 없었다. 알고리즘의 문제일 텐데, 이 정도로 고도화되어 있거나 아니면 나같은 사람들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결국 잘못된 의견이라도 서로 비슷하면 보이고, '다들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구나'로 생각을 이끌어가면서, 서로서로 그 잘못된 의견이 옳다는 결론으로 향하게 되는 알고리즘인 셈이다. 자신의 잘못된 의견을 다른 사람도 같이 생각하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된다. 늘 다수결이 옳다. 실은 그렇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나는 더 나아가 이재명 지사에 대한 반대 의견은 그렇게 소셜미디어를 증폭되었다고 믿고 있다(그 반대일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민주주의적 속성이 왜곡된 것이다. 대부분의 IT 회사들은 사람 탓을 한다. 그 사람이 잘못된 의견을 제시했으므로 그 사람을 차단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노출과 확산은 다른 문제다. 기술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우건은 말한다.

 

옳고 그름은 숫자가 아니다. 특히 정치적 가치 판단은 더욱 그러하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래서 '도덕은 없다'고 했다. 즉 가치판단이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는 회의(懷疑, skepticism) 속에서 모든 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수학적 모델(알고리즘)로 어떤 의견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같은 이들에게 수학만이 구원이었겠지만, 그것은 가치 판단을 위한 수학이 아니라, 수학 그 자체이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알고리즘을 핑계로 가치판단을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수학은 오직 수익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어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된다. 마치 한국의 주류 언론들이 그렇게 끊임없는 기사들로 왜곡하듯이. 나는 아직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들이 기자들에게 당한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다. 언론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면, 대부분의 이들은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날까'라고 생각한다. 실은 아니 뗀 굴뚝인데, 언론에서 계속 연기가 난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집 굴뚝을 실제로 보지 못하거나 볼 생각이 아예 없거나,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봐야 된다는 생각 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때 한줄이라도 기사를 썼던 기자들은 지금에서라도 반성문 한 줄이라도 올려야 된다고 믿는다. 아니면 그런 일관된 태도로 지금 야당 의원들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기사들을 끊임없이 올리든지. 나는 한국의 주류 언론과 그 언론 종사자들이 지금 프랜시스 하우건이 폭로하는 페이스북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긴다. 이는 네이버나 카카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쁜 알고리즘, 혹은 나쁜 미디어 환경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비판적 사고와 태도를 견지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프랜시스 하우건이 저렇게 강도 높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http://www.ziksir.com/ziksir/view/10388?fbclid=IwAR2sVv6236qKI6VsLch2f5AOYwh_PmR9roFLKJ9lSBROmP7VnJZ8uM0RFzU#0DQ5 

 

페이스북 내부고발자 프랜시스 하우건 청문회 모두발언 전문

“페이스북은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www.ziks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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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

시바사키 도모카(지음), 권영주(옮김), 은행나무

 

베란다와 창문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형태가 똑같은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2층 집은 벽에, 1층 집은 바닥에도, 볕이 드는 곳과 그늘의 경계가 보였다.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를 내는 것도 없었다. 해시계처럼 양달과 응달의 경계가 이동할 뿐이다.

 

도서관에서 그냥 집어들고 읽었다. '아쿠타카와 수상작'이라고 하나, 그냥 작은 소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시대 일본을 알 수 있을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관음증적이면서도 쓸쓸한 봄날의 풍경화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도 독자도 심지어 소설 속 인물들 마저도 풍경의 일부가 된다고나 할까. 결코 속마음을 들킬 필요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그 때 그 모습만을 묘사할 뿐이다. 벗도 없고 적도 없는 세상이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대화를 나누지만 사랑을 속삭이지 않는다. 외로워하지 않지만, 끔찍하게 외로운 도시의 사람들이다.

 

“<<봄의 정원>>은 기억과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낯익은 듯한 풍경 속에서, 그리운 사람 혹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먼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꼭 천천히 읽어주세요.” - 작가의 말

 

먼 과거의 일이기에 현재와 겹치지 않는다. 상처 입을 일도 없다. 상처를 입었다면, 이미 아물었을 것이다. 일본 작가들이 향하고 있는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 잘 만들어진 일본 소설들이 가지는 까닭 없는 쓸쓸함을 나는 좋아하지만, 그것은 내 취향이 그럴 뿐이다.

 

현대문학이 지녀야 하는 가치들 중에 그러한 쓸쓸함의 토로가 있을 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전부라면 안 된다. 이 소설은 그것이 전부라는 점에서 상당히 아쉬움이 남는 소설인 셈이다. 또한 그것이 동시대 일본이 겪고 있는 문제처럼 여겨지는 건 나뿐은 아닐 것이다. 

 

(소설은, 문학은, 예술은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강렬한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어떤 건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소설 쓰기에 자신이 없지만, 위대한 작품들이 가진 건 바로 그것이다.) 

 

 

 

시바사키 도모카(柴崎友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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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은 쉽지 않다. 이력서로 사람을 정하기 어렵고 면접으로도 어렵다. 그래서 면접 때 최대한 뽑아내야 하는데, 번번히 실패한다. 그래도 면접을 봐야 하기 때문에, 면접 시 필요한 질문들을 적어본다. 수시로 업데이트해서 관리해볼 생각이다. 

 

1. 자기 소개. 

지원자의 소개를 간단히 받도록 한다. 이력서에 다 있는 내용인데, 굳이 소개를 받아야 되나, 싶기도 하다. 그냥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부분은 내가 연습이 필요하다. 지원자는 왜 소개를 해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내가 설명해야 한다. 

 

2.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는지 물어보기. 

이건 중요하다. 아무 생각없이 지원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회사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준비하고 온 지원가가 있었는데, 업무는 엉망이었다. 여기에 답변이 좋다고 해서 좋은 구성원이 되는 건 아니더라. 

 

3.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하기. 

이 질문을 나에게 해보면, 내 장점은 확실히 내 단점이 된다. 상당히 이상하기도 한데,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는 도리어 결단력이나 실행력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점을 극복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면접장에서의 이 질문은 지원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질문이 될 것이다. 

 

4. 왜 채용해야 되는지 물어보기. 

이렇게 물어보고 채용 확정 통보를 보냈지만, 들어오지 않는 지원자도 많다. 아예 인터뷰 일정을 잡았으나, 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회사 브랜드가 더 중요한 시기다. 이 질문은 조심스럽다. 

 

5. 목표가 무엇인지. 

직장인으로서의 목표가 분명한 것이 좋다. 이 질문은 꼭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면접 시 이 질문을 하는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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