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란 영혼

 

한 일이 년 열심히 캠핑을 다니다가 요즘 뜸해졌다. 그 사이 우리 가족 모두가 바빠졌다. 더구나 올해는 아이가 성당 첫 영성체 반에 들어가면서. 나 또한 아이와 함께 일요일 오전 시간을 비워야만 한다. 일요일을 끼고 갈 수 없어 결국 금요일 오후 캠핑을 가기로 했다. 아내는 직장과 학업으로 모든 것에 열외된 상태라, 나와 아이 단 둘이 가는 캠핑이었다. 아빠와 아들, 하긴 단 둘이 여행을 자주 다녔던 터라 별 이상할 것도 없다. 

 

오후 일찍 출발한다는 것이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늦게 출발하여 어두워질 무렵에서야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식사를 먹으려고 보니, 밤이다. 피곤했던 탓인지, 집에서 먹다 남긴 와인 반 병과 맥주 몇 캔을 마시고 보니, 취했다. 실은 내가 취한 지도 몰랐다. 나는 아이에게 이제 자야할 시간이라고 한 다음, 먼저 쓰러졌다. 그 다음 날 아침의 숙취 탓에 취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조금은 한심한 아빠가 되었다. 초등학생 아들은 밤늦게까지 혼자 불멍을 했다고 한다. 

 

금요일 오후에 출발하는 것이니, 캠핑장까지의 거리도 중요했다. 갈 수 있는 곳으로는 김포나 파주 인근이 적당하다. 그 지역이 아니라면 이동하는 데 최소 두 시간 이상은 소요된다. 막히면 기본 세 네 시간은 걸리고 그 시간 동안 운전을 해 캠핑을 간다면 최소 이박은 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할까. 상당히 피곤하다, 운전은, 캠핑은, 어디론가 떠난다는 건,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가 싫다.

 

새로 생긴 캠핑장이라 시설은 깨끗했다. 하지만 새로 심은 나무에는 아직 이파리가 나오지 않았고(첫 해 나오지 않고 그 다음 해에 나오는 나무도 있다) 캠핑장의 구역을 나누기 위해 심은 작은 향나무 몇 그루는 말라가고 있었다. 잘못 심겨져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도시 근교 촌락, 논밭 한 가운데 자리잡은 듯한 인상을 풍기는 캠핑장으로 주위 풍광은 그닥 좋지 못했다. 캠핑장에 왔다는 걸 주위에 있는 텐트와 캠핑 장비로만 알 수 있을 뿐, 고개를 돌리면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마치 도시화의 밀물 앞에 선 농촌 풍경이랄까. 군데군데 마을이 보이고 작은 공장과 창고가 있는. 

 

그 동안 여러 곳의 캠핑장을 다녔다. 외진 산속에 있는 캠핑장이 좋다. 오래 되었지만, 관리가 잘 된 캠핑장도 괜찮다. 그러나 캠핑장 시설 관리는 쉽지 않다. 금세 낡는다. 매번 다른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와서, 각자의 방식으로 사용하다가, 애정 없이 대하다가, 일상의 스트레스를 쏟아내고 가거나, 또는 어떤 갈등이나 상처를 해소하러 왔다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는 곳, 그 곳이 캠핑장이다. 젊은 연인이 와서 꼭 껴안고만 잘 수 있는 곳이다. 딴 짓을 하면 안 된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크게 틀어서도 안 되고 술에 취해 돌아다녀도 안 된다. 코로나 이후 많은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어도 안 된다. 캠핑 장비로 서로의 경력을 가늠하며 장비 브랜드를 따지기도 하고 서로의 요리 실력을 뽐내기도 하다. 단연 압권은 마치 전쟁터에 나온 군인처럼 배낭 속에서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를 만날 때이다. 대체로 혼자 와서 조용히 모닥불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어두워지면 자고 아침 일찍 떠난다.

 

 

캠핑장 안 주인은 베트남에서 온 여인이었다. 한글이 아직 어눌했지만, 열심히 이야기하려고 했다. 도리어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는 다소 불친절해보이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그 둘은 부부가 아니고, 그 여인은 캠핑장에 일을 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농라와 대나무 모자를 쓰고 캠핑장 여기저기를 정리했다. 봄 햇살이 따스했다. 아침은 어묵탕에 햇반, 그리고 소세지였다. 밀키트가 워낙 잘 나와, 예전처럼 요리 재료를 미리 손질해 준비해올 필요가 없다. 바람이 불었다. 밤에 바람이 없어 텐트를 바닥에 고정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고정했다. 오전에 철수할 예정이었지만. 애완동물을 데리고 올 수 없는 곳인데, 근처를 떠돌던 백구 한 마리가 들어왔다. 집을 잃어버린 백구는 캠핑장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몇 명이 나서서 먹을거리를 챙겨주었다.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완동물을 호기심으로 키우다가 함부로 방치하거나 버리는 이들이 싫다. 

 

세면 시설 등이 관리가 잘 된 캠핑장에서, 적절하게 잘 갖추어진 텐트와 장비로 하루 지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다고 이 거대한 도시의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기회만 닿으면 캠핑을 가려 한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으로.  

 

 

어쩌면 우리의 영혼은 이 무분별한 도시화 속에서 황폐홰져 가는 것일 지도. 근대 문명이 만들어낸 도시는 먼 옛날의 도시와 다른 것이다. 지금의 도시란 운전자 도시다. "운전자 도시란 엄밀한 의미에서 도시라기보다 사적 실내 공간들 사이를 왕복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역기능적 교외일 뿐"이라고 레베카 솔닛은 말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일부의 견해일 뿐, 현대인 대부분은 도시에서 살며 도시의 문명을 즐기길 원한다. 운전자 도시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 카푸어를 마다 하지 않는다. 문득 내 모습을 떠올렸다,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으며. 

 

이 세상에 오래 살수록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록 나는 그 사람들을 잘 모르겠다. 내가 바보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애초부터 바보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투쟁하고 사랑하는 것일까. 

 

마장호수 인근의 기산골 캠핑장에서. 이 곳은 벚꽃 필 때 오면 좋다.

 

 

유식물원 캠핑장. 캠핑장 위에 사과농장이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정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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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지음), 포르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을 그만 두고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는 이의 시선집이다. 아마 자신에게 인상깊었던, 그래서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시들을 모아, 시마다 짧은 에세이를 붙여 만든 책이다. 시를 읽고 싶은 이들에게, 그러나 시를 어떻게 읽어야할 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참 좋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 된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두 세 번 읽어도 된다.

 

이런 책은 참 부담없다. 아무렇게 읽어도 된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더 좋다. 나는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술 한 잔을 마시고 난 다음 이 책을 꺼내 읽었다. 좋았다. 요즘 시인이 누가 있는지, 그들은 어떤 시를 쓰는지 궁금해 이 책을 읽었는데, 아, 이런 대부분 아는 시인들이었다. 시집은 읽지 않았어도 대부분 한 두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이 많이 빠져 있었다. 취향이 다르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이 있었다면 더 기쁜 마음이었을 텐데.

 

대부분의 시들이 좋았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시 몇 편을 옮겨 적는다. 그리고 그 아래에 내 메모도 조금 붙인다. 

 

*    *

 

발견 8

 

2층은 너무 낮고, 4층과 5층은 너무 높고, 3층이 투신자살하기에는 꼭 알맞은 높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마냥 즐겁게 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곤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2층은 너무 가깝고, 4층과 5층은 너무 멀고, 3층이 세상 구경하기에는 꼭 알맞은 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황선하, <<이슬처럼>>, 창비, 1988년

 

 

근래의 시인이라 여겼는데, 예전의 시인들은 대부분 다 아는데, 몰랐다. 그냥 무심코 흘려보냈을 것이다. 이 시의 첫 느낌은 좋다. 적절하게 비관적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비판적 거리'라고 할 때, 그 거리는 어쩌면 3층 높이일지도 모르겠다. 

 

*          * 

 

오이지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 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 신미나,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 2014년  

 

 

꿈에 나타난 옛 애인도 그녀가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오이지의 물기를 짜 달라는 요청을 받고 조금은 섭섭했을 것이다. 실은 꿈 속에서 반가움을 표하며 안부를 물어야 했는데, 오이지를 건네준 것은 어쩌면 헤어짐에 대한 무안함을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헤어진 애인은 이래나저래나 미안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 애인은 참 시인을 미안하게 만들며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전략적 헤어짐이라고 할까. 헤어짐의 까닭을 모두 누구 한 명에서 전가시키는 것. 꿈 속에서도 미안하면, 이건 참, 어쩔 수 없는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오이지니까, 언젠가는 물기가 마르거나 입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미안함도 사라지고 한 때의 사랑도 딱딱해지며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 때쯤 되면 미안함도 없어지겠지. 

 

*       * 



문자메시지

 

형, 백만 원 부쳤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야.
나쁜 데 써도 돼.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년

 

 

이문재의 시집을 구해 읽지 않은 지 참 오래 되었다. 이문재의 첫 시집이 아직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주 가끔 술에 취해 꺼내 읽기도 하니까, ... 시인의 존재를 다시 묻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들의 최근 작들을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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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의 기준 Creative Selection

켄 코시엔다(지음), 박세연(옮김), 청림출판

 

 

페이스북에서 누군가가 이 책에 실린 아래 문장을 옮겼고 나는 그걸 보곤 바로 이 책을 구입했다.

 

1. 영감 inspiration: 거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 가능성 상상하기
2. 협력 Collaboration: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보완적인 장점 결합하기
3. 기능Craft: 기술을 적용해 최고의 결과물을 얻고, 항상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기
4. 성실Diligence: 힘든 일도 마다 않고, 쉽고 빠른 길에 의존하지 않기 
5. 결단력Decisiveness: 까다로운 결정을 내리고, 미루지 않기
6. 취향Taste: 선택을 위한 세련된 감각을 개발하고, 즐거움을 주는 통합된 전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균형감 유지하기
7. 공감Empathy: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들의 삶에 잘 어울리고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제품 창조하기

 

그러나 어떤 방법론이 명확하게 제시된 책은 아니었다. 또한 <<잡스의 기준>>이라는 한글 제목도 적절하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최종 결정을 하는 장면들이 나오긴 하나, 그 과정이 창의적Creative이지 않았다. 켄 코시엔다는 위 ‘일곱가지 핵심 요소는 애플의 일상적인 업무를 요약한 것이며, 동시에 장기적인 발견을 나타낸 것’(9쪽)라고 하지만,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은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에 대한 업무기록을 위 7가지 요소로 배분한 것이다. 애플 안에서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에 올라가는 어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떻게 해결했으며 어떤 점에 집중했는지를 적고 있었다. 따라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이 책은 상당히 유용한 지침서가 될 수 있겠지만, 다른 이들에겐 어떻게 읽힐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책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가 그간 경험해온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를 이 책처럼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완료 기한을 끝도 없이 넘기면서 마무리하는 과정의 연속과 그 고통스러움. 프로젝트의 손익을 따지며 업무 역량이 되지 않는 이들과 같이 일하는 곤혹스러움, 심지어 프로젝트 중간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적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실은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이런 책이나 이런 경험기가 공유되면 어떨까 하는 희망적인 상상을 해보았지만, 그 역시 적절하지 못했다.

 

애플이나 구글에 다닌 이들은 자신이 다녔던 회사나 업무, 문화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하는데, 한국 기업은 그런 사례가 많지 않다. 문화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 근래의 일이고 업무 방식에 대한 것들도 최근의 일이니, 조금 더 기다리면 나올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아주 일부의 일이다. 그렇다면 켄 코시엔다의 이 책은 많이 읽혀져야 할 필요성이 있는 셈이다. 적어도 잘못된 소프트웨어 개발방법론에 대해서 적절한 지적이 될 테니까.

 

첨단 IT 분야에서 흔히 A/B 테스트라고 하는 이런 형태의 실험에서 그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 A/B 테스트는 클릭하기 가장 좋은 파란색을 택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일지 모르나, 최고와 최악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
애플 사람들은 절대 그런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그 어떤 아이폰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도 A/B 테스트를 실시하지 않았다. 색상을 골라야 할 경우, 그냥 하나를 택했다. 그 과정에서 훌륭한 취향을 활용했다. (250쪽)

 

A/B 테스트에 대한 위 의견은 구글과 애플이 어떻게 다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 두 방식 중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지만 두 기업은 서로 전혀 다른 접근을 하면서 성공했다. 그것은 그들만의 방법론이 있고 그 방법론 위에서 자신들의 의사결정 방식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부럽다.

 

첫째, 데모를 만드는 창조적 선택 과정이다. 교차점에서 일하기 개념에 더해, 제품을 개발하는 동안 우리가 변형을 창조했던 방식을 보다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우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알고리즘과 발견적 학습법을 기반으로 첫 번째 모형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코드, 그래픽, 애니메이션, 사운드, 아이콘 등 지원을 끌어내 데모를 구축했다. 데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공유한 뒤, 개선이 가능한 부분을 결정했다. 이는 발견적 학습법을 조율하고, 알고리즘과 발견적 학습법을 조합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과정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선택한 구체적인 수정은 다음번 데모 창조를 뒷받침하는 실천 항목이 됐다. 이 과정이 반복됐다. 이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지속적으로 쌓아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제품 소프트웨어를 완성한 여정이다. (286쪽)

 

애플을 좋아하고 애플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해 알고 싶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이 책은 상당히 권할 만하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아닌 나에게 이 책은 솔직히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 담겨 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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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Hermann Karl Hesse

 

1877년에 태어나 1962년에 작고한 소설가. 세계적인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현대 문학사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의 스타일은 19세기 낭만주의적이며 전혀 모더니즘적이지 않다. 이 점은 나로 하여금 마치 스트라빈스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멋지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영화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시대, 이 사진이 주는 묘한 매력 때문에 여기 올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지만(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담배를 피우는 예술가나 배우의 사진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따라 담배를 피운다. 그 영향으로 인해 대중 미디어에서 담배 피우는 사진이 사라지긴 했지만. 

 

수십년 전 라디오 심야 방송을 듣다보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크눌프>>같은 소설 광고가 참 많이 나왔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소설 광고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니. 어떤 변화는 반갑고 어떤 변화는 쓸쓸하다. 때론 변화가 싫기도 하다. 

 

변하지 않는 세상이 주는 안락함 같은 게 있을까. 마치 중세 시대의 '장원' 처럼. 하긴 그 세계는 늙은이를 볼 수 없는 늙은 세계였으니. 평균수명이 40대였으므로 백발의 노인은 보기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보기 된다면 다들 현자라고 받들어 모셨다. 실제 지혜롭지 않더라도. 변할 것이 없으므로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지혜가 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경험의 현재를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문화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이번 봄엔 헤르만 헤세의 소설 한 두권 읽어야겠다. 몇 해 전 수필집 한 권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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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Entropy

제레미 리프킨(지음), 이창희(옮김), 세종연구원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제 1법칙), 엔트로피의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제 2법칙) - 50쪽

 

그리고 고전 경제학 이론대로 하다가는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165쪽

 

대학 때부터 이 책을 알고 있었으나, 이제서야 완독했다. 너무 뒤늦은 독서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그 시절엔 어떤 이유에선지 이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과학책도 아니고 철학책도 아니며 그렇다고 경제서적도 아니다. 그러나 물리학 법칙에서 시작해 고전물리학을 비난하고 근대 기계론자들-베이컨, 데카르트, 로크, 애덤 스미스 등-을 엄청 공격한다. 뉴턴 물리학을 부정하며(‘뉴턴 물리학은 운동하는 죽은 물질을 순수한 양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재생 가능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에너지 환경에서는 완전히 부적합한 패러다임이다’(289쪽)), 고전경제학으로 살아가면 다 몰락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 가면 전문화를 지향하는 교육도 버려야한다고 말한다. 상당히 과격한 책이다(그리고 상당히 거친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대 물리학에서 정의하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단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실은 ‘시간’이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시간은 규정할 수 없다), ‘시공간’이라는 단어가 맞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덩어리인 관계로,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고 구분 짓는 이것들도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이 정설이다. 우리가 종교철학 등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이 시간을 평면으로 바라본다는 설명이 현대물리학에서 증명한 셈이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유일하게 설명하는 법칙이 있다면, 흔히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알려진 ‘열역학 제 2법칙’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에너지도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운동한다. 그리고 그 반대는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이 그의 전작 <<인터스텔라>>와 다른 이유는, 최대한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연구되고 정의된 우주의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옮긴 영화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론(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반-엔트로피 법칙)을 영화에 적용한 오락영화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테넷>>이 별로였다. 영화 <<테넷>>이 화두로 삼은 법칙이 바로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 - 이제 새로운 세계관이 떠오르고 있다. 이 세계관은 역사를 구성하는 틀로서의 기계론을 결국 대치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앞으로의 세계를 주도하는 틀로 자리잡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를 모든 과학에 있어서 제 1법칙이라 주장했다. 아서 에딩턴(Arthur Edington)경은 이 법칙이 전 우주를 통틀어 최상의 형이상학적 법칙이라고 이야기했다. 엔트로피 법칙은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제 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라는 뜻이다. 제 2법칙(엔트로피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획득가능한 상태에서 획득불가능한 상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는 것이다. (16쪽)

 

제레미 리프킨은 이 엔트로피 법칙을 화두로 근대 자본주의 문명과 철학, 즉 근대 기계론은 공격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20세기 후반의 반-근대주의, 반-기계론 흐름 속에서 리프킨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로크로 인해 현대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계몽시대 이래 개인의 생존 의미와 목표와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버렸다. 인간의 필요와 열망, 꿈과 소망은 모두 물질적 이익의 추구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로크와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도 기계론적 세계관에 도취되어 뉴턴 패러다임의 보편성을 반영하는 경제이론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했다.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에서 애덤 스미스는 움직이는 천체가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우리의 경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법칙을 따르면 경제는 성장한다. (42쪽)

 

그런데 왜 제레미 리프킨의 이 생각, 엔트로피 법칙에서 시작해 근대 기계론을 공격하는 아이디어가 왜 그 무수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이야기하는 책들이나 글에선 언급되지 않았을까. 학문의 분업화, 전문화의 폐해일까, 아니면 그냥 무식했던 자신을 숨기기 위해 외국 학문의 전파자로서만 머문 것일까. 하긴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리프킨의 아이디어는 실은 고전물리학에 대한 반발이며, 고전물리학에 기반한 철학이 근대기계론,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근사한 책을 쓸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이 점에서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들은 대부분 흥미진진하며 놀라운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다.

 

제 2법칙은 이렇게 말한다. 에너지는 한 가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일정액의 벌금을 낸다.” 이 벌금은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있다. 그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Entropy)이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일로 전환될 수 없는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는 수단이다. (51쪽)

 

이 책의 초반부는 왜 엔트로피가 중요하며, 왜 근대 기계론이 잘못되었는가에 할애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한 방향, 즉 앞으로만 흘러간다. 이 방향은 또한 엔트로피 변화의 함수이기도 하다. 시간은 에너지가 집중된 형태에서 분산된 형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비춰준다. 엔트로피 과정을 역행시킬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처음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67쪽)

 

우리는 한 사건과 그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을 통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지구 상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에너지가 소비되고 엔트로피 총량은 늘어난다. 세계가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간다는 뜻이다. 에딩턴 경의 말처럼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이다.” (67쪽)

 

한정된 자원(에너지)를 가진 지구라는 폐쇄계 안에서 우리 인류가 영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기 위해 리프킨은 현재의 위기 상황에 대한 배경이 되는 이론이나 철학을 초반에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의 초판이 1980년도에 나왔다는 걸 떠올린다면, 이 책은 일종의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 당시의 독자들에겐 다소 황당한 어조로 읽혔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과학 책으로 읽혔을 지도.

 

지구라는 폐쇄계에 내재하는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완전히 구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생존과 다른 모든 생물종의 생존은 자연과 화해하고 생태계와 협동하며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 (90쪽)

 

산업화된 국가, 특히 미국은 엔트로피 분수령에 다가서고 있다. 엔트로피 분수령으로부터 400년이 지난 오늘날 전세계의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급격히 고갈되고 있다. 에너지 흐름의 각 단계마다 기술, 기구 등 변환자들이 더욱 복잡해지고, 집중화되고, 전문화됨에 따라, 사회의 혼란이나 무질서가 증가했다. (153쪽)

 

그는 각 분야별로 우리 인류는 어떻게 자원을 낭비하며 엔트로피 법칙와 무관하게, 그것을 더욱 가속시켜 몰락을 재촉하는 활동을 가지고 있는가를 지적한다. 특히 미국의 사례를 자주 언급하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200년 전 에덤 스미스가 현대 경제이론의 주춧돌을 놓았던 것처럼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들은 전통적인 기계 패러다임을 따르는 경제 모델을 택하고 있다. 모든 경제 정책의 배후에는 뉴턴, 데카르트, 베이컨, 로크, 스미스의 망령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시스템을 이렇게 파악한다. 경제 시스템이란 기계적인 과정으로서 수요와 공급 기능이 시계추처럼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끊임없이 상호 조정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은 시장 구조를 부정하지만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처럼 전체적인 경제 환경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159쪽)

 

최근의 기후위기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한 다양한 규제 활동들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만, 이 책에 나왔을 무렵에는 주류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열역학 제 2법칙을 이야기하면서 근대 기계론, 고전물리학, 고전경제학을 공격하고 그 사상으로 만들어진 근대 자본주의/사회주의를 비난하며, 근대적 삶의 형태들까지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이 상당히 도덕적이며 명상적이며 환경보호적으로 끝나는 것이 다소 맥 빠지긴 하지만(차라리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래도 나온 지 수십년이 지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상당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제레미 리프킨을 다시 보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비판도 많이 받는다.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을 잘못 이해하고 마치 절대적인 진리임을 가정하고 책이 서술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비판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가령, 물이 얼음으로 변할 때는 엔트로피는 감소한다. 특히 통계역학에서는 엔트로피는 확률에 의해 지배받는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여러 사례나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거나 단편적으로 인용되고 잘못된 이해된 채 서술되기도 한다(특히 일리야 프리고진의 이론). 

서강대학교 화학과 이덕환 교수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물론 현대사회는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이 책이 에너지와 자원의 무절제한 낭비를 일삼는 우리를 꾸짖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 가치를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논리와 결론이 너무 빈약하고, 표현도 너무 선동적이다. (...)

여기서 말하는 열역학은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평형"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정립된 "평형 열역학"이다. 여기서는 평형의 상태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 외부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에너지"라고 부르고, 평형상태에서 "자발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변화의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서 "엔트로피"이라는 이론적인 개념을 도입한다. 

평형 열역학은 평형의 의미를 정의하는 "제0법칙"과 에너지를 정의하는 "제1법칙",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제2법칙", 그리고 엔트로피의 절대값을 정의하는 "제3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잘 알려진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고,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표현은 정교한 논리로 짜여진 열역학 법칙을 매우 느슨하게 나타낸 서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열역학 법칙에서 말하는 '우주'는 "평형 상태에 있는 가장 큰 고립계"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새로운 생명과 별의 탄생과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우주는 평형에 있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의 우주는 마침내 평형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열역학에서 말하는 "우주"가 된다. 그런 평형 상태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런 우주에서 다시 자발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가 또다른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우주"의 엔트포리는 처음보다 클 것임을 예언한 것이 바로 제2법칙이다. 

- 이덕환, <열열학을 벗어나 버린 엔트로피>,  <<서평문화>>, 2012년 12월

 

경상대 물리교육과 윤석주 교수는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과학자들이 알아낸 경험 법칙이며 확률적 내용을 담고 있다"며 경험적이고 확률적인 법칙에 대한 확신은 금물임을 강조했다. 또한 윤석주 교수는 리프킨이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잘못된 개념에 근거한 문명 비판과 미래 예측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푸념에 불과하다"며 "리프킨이 열역학 제2법칙을 맹신하면서도 다른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한다. (...) 윤석주 교수는 리프킨의 오류를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정도'라고 해석하는 데서 생긴 것으로 본다. "여기서 무질서는 원자의 입장이 아니라 관찰자, 관리자의 입장으로 본 것이라며 향수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향수냄새를 없애거나 관리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향수 냄새가 퍼지는 엔트로피의 증가 현상이 무질서의 증가로 보인다. 하지만 향수 기체의 입장에서는 자유가 증가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윤석주 교수는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정도'가 아닌 '자유의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 경대뉴스 https://www.gnu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7034 

 

[특강] 옳은 이야기일지라도 근거는 과학적이어야 - 경대뉴스

지난 5월 19일 인문대 아카데미홀에서 우리 대학 인문학 연구소가 주관한 ‘우리 시대의 책 읽기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번 특강에서 윤석주(사범대 물리교육과) 교수가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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