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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인생의 발견 The Hidden Pleasures Of Life 

시어도어 젤딘 Theodore Zeldin (지음), 문희경(옮김), 어크로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다. 시어도어 젤딘이라는 학자를 알지 못했으며,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인문학 서적일 지 예상하지 못했다. 시어도어 젤딘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들과 저서들, 그리고 관련된 인용과 이야기들로 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으며, 고대와 현대, 중세를 오갔다. 지역과 세대를 넘나들며 독자들로 하여금 사고의 틀을 깨고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해주었다. 특히 '1866년 벵골에서 태어난 하이마바티 센Haimabati Sen의 기록'은 무척 흥미로웠으며, 뿐만 아니라 에이젠슈타인, 메버릭, 심복, 린네 등 각각의 사례들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시어도어 젤딘을 찾아보았다. 



Theodore Zeldin is an Oxford Scholar and thinker whose books have searched for answers to three questions. Where can a person look to find more inspiring ways for spending each day and each year? What ambitions remain unexplored, beyond happiness, prosperity, faith, love, technology or therapy? What role could there be for individuals with independent minds, or who feel isolated or different, or misfits? Each of Zeldin's books illuminates from a different angle what people can do today that they could not in previous centuries.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Theodore_Zeldin

시어도어 젤딘은 옥스포드 학자이며 사상가로, 그의 책들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매일 그리고 매년, 보다 강한 영감 넘치는 방식으로 보내길 원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그 방식을 찾아야 할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행복, 번역, 신념, 사랑, 기술 혹은 치유 너머 남아있는 야망들은 무얼까? 자립심이 가진 개인에게는 어떤 역할이 가능할까? 또는 고립되었거나 다르다거나, 또는 불적응이라고 느끼게 되는 이들은 누구일까? 젤딘의 책들 각각은 사람들이 이전 시기에는 가능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가능한 어떤 것들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인문학을 하다보면, 단어의 역사를 따져묻곤 한다. 라틴어 어원을 찾기도 하고 시대마다 단어의 형태나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피면서 현재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우리 나라 말로는 '사업'이라고 번역되는 Business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비즈니스Business'란 원래 불안, 고충, 참견하기 좋아함, 어려움을 뜻하는 말이었다. - 9쪽 


어쩌다가 비즈니스라는 단어가 요즘과 같은 의미가 되었을까에 대해선 젤딘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다만 젤딘은 비즈니스가 다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겠다고 말할 뿐. 어쩌면 이 책 전체가 그 가능성이 아닐까. 온통 돈 버는 이야기들로만 채워진 지금/여기에 대해, 그는 그것을 넘어 인생을 새로 정의하고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 말이다. 원래 불안하고 힘들고 어려운 어떤 것 - 어쩌면 '인생'같은 것 - 에 대해 참견하기 좋아하는 Business 같은 가능성. 


한때는 상업적인 회사가 불신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주기적으로 발생하던 금융위기가 한 차례 지나간 후 한 세기 내내(1720년부터 1825년까지) 영국에서는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형사 범죄였을 만큼 회사에 대한 불신이 컸지만 오히려 이 기간에 크게 번창했다. 농업과 공업과 서비스업의 사회가 자연 질서의 일부이고, 자원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학교에서는 오늘날의 대기업들은 역사의 우연한 사건으로 발생했고 미국이 건설하려던 자유의 나리에도 한때는 두 가지 기업이 존재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 248쪽 ~ 249쪽 


실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 이런 기업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업이 지배하는 듯이 여기지는 21세기 초반에 젤딘은 화가 벤저민 헤이든(Benjamin Haydon, 1789 ~ 1846)과 그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벤저민 헤이든의 삶에는 상반된 두 문명이 존재했다. 빚은 우정이나 연민이나 격려의 징표일 수 있다. 혹은 순전히 상업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헤이든의 집주인은 밀린 집세가 100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1만 파운드에 달했을 때도 그를 내쫓지 않았다. "선생은 형편이 되면 집세를 냈소. 다음에 돈이 생길 때 집세를 내면 되지 않겠소?" 헤이든이 작업 중이던 대형 그림을 완성하려면 2년 더 걸릴 거라고 말하자 집주인은 2년 더 기다려주겠다고 답했다. 집 근처의 존 오그로츠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밥값을 이튿날 갚아도 되냐고 묻자 식장 주인은 헤이든을 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장기간 외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 107쪽 


헤이든은 두 문명, 곧 이웃의 정이 살아 있는 문명과 돈이 권력을 휘두르는 현실에 만족하는 문명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나라에서 살았다. 단순히 도시화와 산업화와 인구 과잉의 압력 속에서 이웃의 정이 무관심으로 변하거나 사회가 상업화되면서 사적인 연민을 바탕으로 한 대출과 상부상조가 줄어든 정도가 아니었다. 헤이든은 결국 정서적 유대가 없는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지 않아 일곱 번 체포되고 네 번 감방에 갇히고 집달관이 그의 재산을 전부 청산하고 그림붓까지 팔아서 빚을 갚는 지경에 이르자 세상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무언가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113쪽 ~ 114쪽 


그리고 젤딘은 '이런 변화를 추동한 것은 바로 평등이라는 새로운 이상이었다'고 말한다. '빚을 지면 남에게 소유당한다'고 여기며 본격적인 개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는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며, 같은 방향을 향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자유'를 말하지 않고 '평등'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웠다. 보통은 '자유'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건 조금 더 생각해볼 지점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서로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가장 우울한 자살은 고마워하는 마음의 자살이다. 시기와 탐욕과 오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만성질환이지만 그나마 고마워하는마음이 있었기에 억제되었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한때 사회를 융화시키거나 적어도 혐오감을 줄여주는 끈이었다. 이를테면 신, 조상, 부모, 스승, 이웃, 자연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평등을 염원할수록 권리가 기반을 이루고, 상업화될수록 고마워하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든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독립에 대한 모독이자 자존심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고마워하는 마음은 비싸다"라고 말했다. 디드로는 "고마워하는 마음은 짐이다." 스탈린은 "고마워하는 마음은 개들이 앓는 병이다"라고 말했다. - 117쪽 


하지만 우리는 고마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이 세상을 살아야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길 희망하면서,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더 깊은 고민을 하며, 방황해야 할 것이다.  


퇴로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응할 때 삶의 의미가 생긴다. - 30쪽 


퇴로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어떤 것일까. 이 책은 퇴로가 보이지 않을 법만한 질문들과 고민들을 모으고, 그런 질문과 고민을 했을 법한 과거의 인물을 끄집어내어 현재의 우리 옆에 앉혀놓는다. 가령, 아인슈타인처럼. 


"나는 만물의 조화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지,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신은 믿지 않습니다." 

"지식 분야의 모든 영역이 전문화되면서 지식노동자와 비전문가 사이의 간극이 더욱 커질 것"

"수학자들이 상대성 이론에 난입한 바람에 나도 이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수선한 책상이 어수선한 마음의 상징이라면, 빈 책상은 무엇을 상징하겠는가?"

"권위를 경멸하는 내 죄를 단죄하기 위해 운명의 여신은 나를 권위자로 만들었다."

"세상에 알려지고도 지독히 외로운 것은 이상한 일"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를 나를 좋아하는 건 왜일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은 그저 오래된 착각일 뿐"

- 아인슈타인의 말, 168쪽 ~ 169쪽, 171쪽


젤딘도 어차피 미래를 알 수 없고 불확실하며(아인슈타인을 위시한 현대물리학자들을 인용하면서), 도리어 불확실성이 축복임을 강조한다. 아예 푸엥카레는 "모든 확실한 것은 거짓"이라고 믿었다고.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은 가장 유명한 덴마크인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은 152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 210쪽


덴마크 사람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만, 역사적으로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던 여러 인물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불화를 찾는다. (...) 나 역시 세상의 불화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늘 불안에 시달렸다. 역마차에서는 다른 승객이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망상에 사로잡혔고, 화재가 나면 밖으로 뛰어내리기 위해 항상 밧줄을 가지고 다닐 만큼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산 채로 매장될까 봐 침대 머리맡에 "그냥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놓아두었다. - 211쪽 


덴마크 안에서 불안을 느꼈으며, 그 곳을 싫어했던 안데르센. 그래서 덴마크의 복지 수준이 높은 것일까라고 젤딘은 다시 물으며, 복지 수준이 높다고 해서 덴마크에 사는 것을 모두 행복해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젤딘은 지적한다. 


젤딘은 자주 예상하지 못한, 다소 반어적인 사례를 들며, 독자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다시 묻도록 요청한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를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꼼꼼히 읽게 된다. 책을 읽는 시간은 길어지고 노트는 많아진다. 결국엔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하지만 남들처럼 나도 대학 교육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전세계로 퍼져나간 거대한 무지의 구름을 예상하지 못했다. 박사학위 논문과 교수 논문의 쓰나미가 지식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 정보가 늘어날수록 무지도 커진다. - 410쪽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의 명성에 관해 이렇게 섰다. "물리학을 설명하기 위한 수학공식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 경험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해시키기 위해 시도하는 언어의 그림일 뿐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여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확실성의 정도가 천차만별인 진술의 덩어리이다. (...) 이런 무지와 의심을 인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학의 제 1원칙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 나는 항상 모르고 산다." - 416쪽 


새로운 무지의 시대에 들어섰다. 거참,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진 시대이지만, 어쩌면 가장 무지한 시대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엔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된다. 그래서 현대의 노인은 젊은이에게 무시당한다. 그들이 젊었을 때 배웠고 그들을 영광스럽게 해주던 정보나 기술은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이 되었고 변해버린 이 세상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졌던 경험은 지금/여기에선 아무 쓸모도 없다. 심지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서로 만나고 연애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위해 사랑에 대한 상담이나 조언도 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과연 이건 옳은 일일까. 그래서 젤딘은 이렇게 묻는다. "알아야할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지만 결국 정보가 늘어날수록 우리의 무지는 넓어지고 깊어진다. 


린네는 해방자로 불렸다. 미터법이 사람들을 지역마다 제각각인 중량과 치수의 혼동에서 해방시켜 주었듯이 린네의 분류체계는 생명의 다양한 양식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합의를 끌어냈다. 하지만 단순화를 추구한 그의 열정은 독립적인 사고를 권장하는 해방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간단하고 확고한 특징을 기준으로 생명체에 표식을 붙일 수 있을 때만 편안함을 느꼈다. - 255쪽 


여자와 남자 이야기를 하기 위해 린네를 떠올리는 건 참 흥미로운 접근이었다. 젤딘은 사람들은 대체로 새로운 개념을 반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린네처럼. 아마 우리 대부분 그럴 것이다. 모호한 것은 싫고 확실한 것을 선호한다. 푸엥카레가 '확실한 건 거짓'이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소수의 의견일 뿐이다. "교육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어도 남자와 여자는 엄청난 벽을 사이에 두고 의사소통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의 린네, 결국 편견이거나 오류로 드러나게 될 어떤 기준이나 확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다. 리더십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베니스가 평생 리더십에 집착하고 리더십을 진지하게 관찰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리더가 되는 것은 결국 품위 있는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리더에게 '비전'이 없다면 제대로 된 리더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전'이 없다면 제대로 된 리더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유일한 비전은 "너 자신이 되어라"였다. - 328쪽 


워렌 베니스는 현대경영학, 특히 조직론/리더십 분야에 있어서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제시한 것은 "너 자신이 되어라". 다시 말해 우리는 끊임없이 리더가 되길 바라는 어떤 사회에 속해 있다. 학교든 기업이든, 우리가 속한 조직에서 리더가 되어야만 된다는 어떤 강박 같은 것이 존재하는. 젤딘은 이렇게 묻는다. "리더가 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무엇인가"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세계 챔피언이던 크리스 에버트Chris Evert는 경기에서 어떻게든 이겨서 상대를 물리치는 것이 목표였다. 에버트의 경쟁자였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는 조금 달랐다. 이민자이자 획일주의와는 거리가 먼 동성애자 해방운동의 영웅으로서 상대 선수들과 친구가 되고 관중에게 사랑받으려 하고 남다른 관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어했다. - 331쪽 


세상은 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도리어 우울해하고 절망에 휩싸이며 추상적인 어떤 것을 묻는 질문 앞에서 답답함만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삶을 증오하고 세상을 미워할 각오를 다진다. 이 책은 그런 우리들을 위한 사소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을 지도. 


젤딘은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여러 책들과 인용로 우리를 설득시킨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삼스럽게, 또는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고 읽고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아마 역사 전공자들이 가지는 탁월함이 아닐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아마 읽는 시간이 상당히 걸리겠지만, 충분히 보람은 있을 것이다. 



인생의 발견 - 10점
시어도어 젤딘 지음, 문희경 옮김/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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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시집을 꺼내 읽는다. 어느 토요일 오전. 가족 몰래 나온 도서관. 가끔 가서 책을 빌리는 동작도서관 3층. 어색한 시집 읽기다. 한 때 시인을 꿈꾸기도 했지. 그러게. 요즘 시들은 어떤가. 문학상 수상 시집을 꺼내 읽는다. 한 시가 눈에 꽂힌다. 이영주다. 예전에도 이 도서관에서 잡지에 실린 시를 읽고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지. 하지만 그녀의 시집을 사진 않았어. 이번엔 사야 하나. 길게 마음 속으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시를 노트에 옮겨 적는다. 몇 개의 계절이 지난다. 지났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고, 나는 출근을 했다. 그리고 밤이 왔다. 시를 블로그에 옮겨적는다. 그러게 이번엔 이영주의 시집을 사야 하나. 이번엔 짧게 고민해야지. 


**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있다. 형태를 만져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십 년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곳은 얼마나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거지. 그의 다리에서 생생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가 뿌린 흙 위에 나는 서 있다. 이곳은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난다. 잠깐 동안 그는 앉아 있었는데, 동그랗게 어두워지는 자리였다. 내가 어지러워 돌처럼 흘러나가는 자리. 소파에 앉아서 그는 흩어진 잔해들을 본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집이라는 집은 없다. 고향이 없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치지. 


- 이영주, <<간발 -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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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종일 집에 틀어박혀 두 권의 책을 다시 펼쳤다(리뷰를 쓰지 못했기에). 젤딘의 <<인생의 발견>>과 바라트 아난드의 <<콘텐츠의 미래>>. 그리고 한 권의 책, 게오르그 짐멜의 <<렘브란트>>를, 억지로 다 읽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인생의 발견>>과 <<콘텐츠의 미래>>를 정리해 블로그에 올렸다. 오랜만에 트래백(trackback)을 해볼까 했더니, 네이버 블로그엔 그런 기능이 아예 없었다. 아난드는 콘텐츠의 미래는 '연결관계connection'에 있다고 했는데... 


아이와 함께 노량진수산시장에 가서 전복과 산낙지를 샀다. 며칠 전부터 전복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주말에 간 것인데, 살아있는 낙지를 보더니, 그것도 먹고 싶다고. 결국 전복과 산낙지를 사와 집에서 산낙지부터 회로 준비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걸 자르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거의 먹지 못했고, 결국 남은 것은 라면에 넣어 먹었다. 


연초부터 일이 많았다. 야근을 밥 먹듯 했고 술자리도 있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꿈을 가지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내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사라질 기미마저 없다). 시간만 나면 뭔가를 꿈꾼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새로운 사랑에 대한 꿈까지도. 


이 세상은 위계적 질서의 반영(doctrine of analogy)이라고 플라톤, 그리고 이후의 철학자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절정은 플로티누스와 중세 철학자들이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겠지만, 가끔 그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랬으면 나는,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며 꿈을 꾸지 않을 것이고 어떤 사소한 가능성 앞에서도 흥분하지 않았을 텐데(어쩌면 근대는 인간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바로크의 꿈이기도 했다. 나, 근대적 자아/주체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으리라는 바로크의 꿈 말이다).


짐멜은 플라톤 철학을 연극적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저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배우들이고. 다른 말로 하지만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인 셈이다.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는 아예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이라는 작품을 짓기도 했지만. 이 연극의 극본은 일종의 설계도, 형상(eidos)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연극배우였던 어떤 이가 말하길 자신은 연극무대가 끝났을 때 한없이 슬퍼더라고 ... 연극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직선적 세계관이다. 신은 그 직선의 시작과 끝에 서있고 이를 동시에 바라본다. 그래서 이 세계가 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작년 연말에 갔던 강원도 어느 강변 산책가 나무 계단 속에 네 잎을 가진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우연히 보고 사진을 찍었다. 나이가 드니, 사소한 것 하나에 마음이 설렌다. 아니면 마음이 설레고 싶은 것이다. 마음 설렐 일이 너무 드물어진 탓일까. 아, 대학시절땐 길 가던 긴머리 소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미소만 지어주어도 설레었는데(지금은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하고 걱정부터 먼저 한다)


올 한 해 가슴 설레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잠시 그런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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