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침묵에의 지향

지하련 2010. 4. 25. 06:24

 

잠자리에 일찍 들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가라 앉고 까닭 없이 끝 간 데 모를 슬픔으로 가득 찰 때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거나 글을 읽거나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악기 하나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지만, 지방 중소 도시에서 자란 터라 학원도 많지 않았고 여유도 되지 못했다. 그 흔한 기타 하나를 사놓긴 했지만, 몇 곡 연습하다 그만 두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기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버린 적이 없는데.)

 

우울할 때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지난 연말부터 무너진 마음이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 쫓기듯 살아온 걸까. 아니면 게을러져서. 그것도 아니라면, 판도라의 상자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인터넷 서점에서 슈베르트와 고흐, 아르보 페르트와 나쓰메 소세키를 주문했다.

 

오늘은 일정이 빠듯하다. 오전에는 여의도 근처, 오후에는 삼성동 코엑스, 청담동, 압구정동을 거쳐야 한다.

 

당분간 말을 줄이고 침묵을 즐겨야겠다.

 

1505년에 그린 조반니 벨리니의 피에타. 16세기 초반 베네치아. 막 세기말이 지났으므로 세기말의 어수선함이 아직도 남아있으나, 세기 초의 열광적인 기분은 느끼지 못하고 고작 불투명한 안도감 정도. 논리적으로는 신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종교적 미덕과 가치가 세속화되는 세계 앞에서 무너지고 세속적 가치로 대체되던 시대. 마치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수작을 거는 남자에게, 아니면 이미 바람난 아내의 부도덕함에 격분하여 바람 피운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자신의 도덕적 정당함은 증명하지 못한 채, 결국 죽어버리고 마는 생의 역설마냥, 벨리니의 피에타는 한없이 쓸쓸하고 슬프다. 과거는 이미 잊어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고 믿었으나, 마음이 낸 상처로 인해 모든 인지를 상실한 시대. 쓸쓸함과 슬픔이 지나치면 혁명이 도래하는 걸까. 아니면 광포한 현실정치가 도래하는 걸까. 아니면 다락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쓸쓸히 죽어가는 걸까(폰토로모는 그렇게 죽었다). 오늘 종일 조반니 벨리니의 이 작품이 떠오를 것 같다. 하지만 내 생이 이토록 쓸쓸하고 슬프지 않기를 바란다.

 

조반니 벨리니, '피에타', 패널에 유채, 65*90, 1505, 이탈리아 아카데미아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