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The dark side of reason

지하련 2010. 5. 10. 23:35

 

 

 

질서는 언제나 선행하는 무질서를 가진다. 그리고 그 질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다시 무질서가 도래한다. 우리가 이성(reason)이라고 부른 것의 역사는 고작 몇 백 년도 되지 않으며, 그 이성대로 살았던 적은, 그 이성의 빛이 전 세계에 고루 비쳤던 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시대에 이미 반-데카르트주의자가 있었다. 현대의 반-데카르트주의는 일군의 영국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길에 편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수선한 마음이 지나자,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어수선해졌다. 어수선한 마음이 지나자, 어수선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갈 뿐이지만, 누군가는 교통 정리를 해줘야만 한다. 마치 이성처럼. 칸트가 열광했듯이, 뉴튼이 그런 일을 했다. 그는 놀랍게도 우주의 별들까지 교통 정리했다. 근대적이고 도구적이며 계량적인 이성의 역할이었다. 신을 대체한 이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느 곳에서는 진실이지만, 어느 곳에선 거짓임을 안다.

 

그런데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세상을 경험할수록, 알아갈수록, 세상은 미로가 되고, 미궁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연애를 시도할수록 내가 연애에는 아무런 재능도 지니지 못했음을 자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는 이성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대다. 이성이 비추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자. 현대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그림자로 둘러쳐진 이성의 주위만 빙빙 돌 뿐이다. 그리고 결국엔 절망만을 구할 뿐이다. 세상에 대해서 안다고 했으나, 1%도 되지 않는 세상의 일부라는 절망. 마치 사랑을 갈구했으나, 정작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끔찍스러움처럼 말이다.

 

문득 남겨진 내 인생의 궤도가 궁금해졌다. 잠을 자면 좀 행복해지려나.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를 다 읽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클래식 연주회 티켓을 끊어, 연주회를 보러 갈 생각이다. 그 동안 나는 쫓기는 삶을 살았다는 반성을 하고 있다. 아무런 열쇠도 나는 쥐고 있지 않으면서, 마치 열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왔던 것이다.

 

 



역시 오래된 노래가 좋다. 산타나가 다시 한국에 올 일은 없겠지.